밀양김씨 본관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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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01.png 밀양김씨본원유사(密陽金氏本源遺事)

우리 밀양김씨(密陽金氏) 신라대보공(新羅大輔公) 휘(諱) 알지(閼智)의 후예(后裔)로서 세계(世系)는 7세(七世) 미추왕(味鄒王) 8세(八世) 내물왕(奈勿王) 11세(十一世) 지증왕(智證王) 19세(十九世) 원성왕(元聖王) 22세(二十二世) 신무왕(神武王) 23세(二十三世) 원성왕(元聖王) 왕자왕손(王子王孫)으로 신라천년(新羅千年)의 찬란(燦爛)한 역사(歷史)를 이어온 28세(二十八世) 경순대왕(敬順大王) 신라(新羅) 제56대왕(第五十六代王) 김부(金傅)의 제3자(第三子) 명종(鳴鍾) 영분공(永芬公) 경주군(慶州君)의 제13세손(第十三世孫)이신 휘(諱) 김승조(金承祖) 사직공(司直公) 밀성군(密城君)이 우리 밀양김씨(密陽金氏)의 관시조(貫始祖)이시다.

 

시조(始祖) 사직공(司直公) 밀성군(密城君)께서는 경주김씨(慶州金氏) 후손(後孫)으로 휘 후덕공(諱候德公:전주내급사(殿主内給事)) 휘 영고(諱永固:열문지후(閱門祗候)) 12세(十二世) 휘 인경(諱仁鏡) 명암공(明庵公) 정숙(貞肅) 평장사(平章事)와 덕흥홍씨(德興洪氏) 경준(景俊)의 딸 사이에서 차자(次子)로 기원(紀元) 三五六二年 서기(西紀) 一二二九年 기축(己丑) 고종(高宗) 16년(十六年) 8월(八月) 14일(十四日) 경상도(慶尚道) 경주(慶州)골에서 탄신(誕辰)하시였다. 용모(容貌)가 기이(奇異)하신 공(公)께서는 성품(性品)이 강직(剛直)하였고 소년시절(少年時節)에 부모님(父母任)의 엄격(嚴格)한 정훈(庭訓)에서 학문(學問)의 기초(基礎)를 닦아 성장(成長)함에 천성중후(天性重厚)하고 유달리 총명(聰明)하고 충효(忠孝)의 절의(節義)와 제세(濟世)에 뛰어나 칭송(稱頌)이 자자(自恣)하신 공(公)께서 안동(安東) 김방경 선생(金方慶先生)의 문하(門下)에서 수학(修學)하면서 심오(深奥)한 뜻을 물어서 학문(學問)을 수업(授業)하고 특(特)히 병술(兵術)에는 비범(非凡)이 뛰어나시고 활(弓)쏘기에 명궁(名弓)이셨다. 선비로서 자세(姿勢)를 갖추고 있을 쯤에 고려조(高麗朝)에서 낭장(郞將)의 벼슬길에 오르셨다.

 

 

 

기원(紀元) 3580년(서기 1247년) 정미(丁未) 1월에 김해김씨(金海金氏) 경유(鏡裕) 직장(直長)의 딸을 배필(配匹)로 맞이하여 휘 혁(諱赫:일명(一名) 숙신(叔臣)) 찬성사(贊成事) 손(孫) 휘 희천(諱禧天) 검열관(檢閱官) 5세(五世) 휘 영추(諱英秋) 공부시랑(工副侍郞)께서 호남지방(湖南地方)에 세거(世居)하면서 혈통(血統)을 계승(繼承)하였고 휘 봉상판관(諱奉常判官) 경양공(京陽公)은 경기(京畿) 충청지방(忠清地方)에 6세(六世) 광석(廣碩) 밀양부사(密陽府使)께서는 함경도(咸鏡道) 평안도(平安道) 황해도(黃海道) 강원도(江原道) 지방(地方)에 8세(八世) 윤택(潤澤) 진사(進士) 도사판관(都事判官)께서는 경기도(京畿道) 포천지방(抱川地方)에 8세(八世) 홍준(弘濬) 한성부윤(漢城府尹)께서는 충청도(忠清道)에 기타지(其他地)에 이어 혈통(血統)이 계승(繼承)되어 후손(後孫)들이 번창(繁昌)하여 국가(國家)와 사회(社會)에서 관직(官職)에 공신(功臣)이 많이 배출(輩出)되고 있다.

 

기원 3603년(서기 1270년) 경오(庚午:원종(元宗) 11년) 6월에 고려장군(高麗將軍) 배중손(裵仲孫)은 고려조(高麗朝)가 개경(開京)에 환도(還都:강화도(江華島)에 피신 당시)하여 몽고(蒙古:오랑캐 북호(北胡)) 침입군(侵入軍)에 굴복(屈伏)하는 것을 반대(反對)하고 강화도(江華島)에서 일대반란(一大反亂)을 일으켰으니 이것이 저 유명(有名)한 삼별초(三別抄:좌(左)ㆍ우(右)ㆍ신(神))의 난(亂)이 전국(全國)을 휩쓸고 걷잡을 수 없이 각처(各處)에서 관료(官僚)들이 호응(呼應)하고 협세(挾勢)함으로써 일부(一部)에서는 살인방화(殺人放火)가 자행(恣行)되고 있는 난(亂)은 경상도(慶尚道) 제주도(濟州道) 전라도(全羅道) 진도(珍島)까지 반란군(反亂軍)이 지열(地熱)하여 약(若) 3년간 계속(繼續)된 사건(事件)이다.

이때 낭장(郞將) 김승조공(金承祖公)께서 의병(義兵)을 모집(募集)하여 김방경장군(金方慶將軍)의 막장(幕將)으로 자원(自願)하여 의병장(義兵將)이 되시어 전투(戰闘)에 출정(出征)하자 연전연승(連戰連勝)으로 반란군(叛亂軍)을 섬멸(殲滅)하고 평정(平定)시키고 대공(大功)을 세우시니 공(公)의 의병군(義兵軍)을 초승군(超乘軍)이라 일컬었고 기원 3604년(서기1271년) 원종(元宗) 12년 1월에 익호장군(翼虎將軍)이라 칭호(稱號)를 받고 그 시절(時節)에는 밀성(密城:밀양) 지방(地方)은 삼별초(三別抄)가 자주 출몰(出沒)한 지역(地域)이라(고려사(高麗史)는 밀성(密城)의 반란(反亂)을 이렇게 적고 있다. ‘밀성군인(密城郡人) 방보 등 5명(方甫等五名)은 부사(府使) 이이(李頤)를 죽였다’라고) 관료(官僚)들도 호응(呼應)하고 있다는 첩문(牒文)을 접(接)한 고려조정(高麗朝廷)에서는 의병장(義兵將) 김승조(金承祖) 낭장(郞將)께 명(命)하사 밀성(密城)고을에 출정(出征)하라 하였다.

 

 

 

공(公)은 의병군(義兵軍)을 거느리고 전주방어사(全州防禦使) 김구(金瞘) 경주판관(慶州判官) 엄수(嚴守)가 병졸(兵卒)을 이끌고 연합(聯合) 작전(作戰)하여 급(急)히 이르자 천등(阡等)도 합세(合勢)하여 반란두목 방보 등(反亂頭目方甫等)을 목 베이고 잔당(殘黨)을 항복(降伏)받고 밀성(密城)고을이 마침내 평정(平定)되자 고을 사람들은 기뻐하였다고 한다. 공(公)께서 큰 공(功)을 세우자 고려(高麗) 원종왕(元宗王)께서 가상(嘉尚)하시고 사직(司直)의 관직(官職)과 밀성군(密城君)으로 봉(封)하시고 시호(諡號)를 홍의제(弘毅齊)라 하사(下賜)하시자 시조(始祖) 사직공(司直公) 밀성군(密城君)께서는 본 경주(本慶州)에서 밀성(密城:밀양(密陽))으로 분관(分貫)하게 되자 후손(後孫)들은 본관(本貫)을 밀양(密陽)으로 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또한 “불능실기(不能悉記:불가능한 실기)” 승조공(承祖公)은 여고지지효안자지락(與考之志效顏子之樂)이시고 모화하지문물(慕華夏之文物)이시고 개백세지현송산증중청(開百世之絃誦山增重清)하고 향지인사(鄕地人士)이고 출입회황자(出入徊徨者)이시고 역시(亦是) 무촉흥감(撫躅興感)하고 이애지여영광공벽(而愛之如靈光拱璧)이시고 즉비지고야(則碑之固也)는 연구유비(然舊有碑)라 12세손(十二世孫) 부사(府使)는 가기기(可幾記)를 사자(使子) 참판(叅判) 덕민서(德民書)이나 지우금(至于今)은 자진만환(字盡漫槵)되어 불가독(不可讀)이라 고후손(故後孫)은 구유촉지잉민(懼遺躅之仍泯)하고 개석중각(改石重刻)하니 이도불후어구원야(以圖不朽於久遠也)라 희(噫)고 공몰(公沒)되 태오백여리(殆五百餘裡)되니 기류풍여운(其流風餘韻)이나 구이불참(久而不斬)하나 산천정채초목광화(山川精彩草木光華)이고 의구시장(依舊是藏)하고 수지소(修之所)는 이초예승승(而肖裔繩繩)하여 세수기지(世守其址)하고 일심제성(一心齊誠)하여 구적복천(舊跡復闡)하나 개비(豈非) 공지덕지심(公之德之深)이고 극창궐후어무궁자호(克昌厥後於無窮者乎)이라 내위지명(乃爲之銘)이 왈명악올올(曰明岳屼屼)마다 암석촉촉삭(岩石矗矗削)여 금열병(金列屏)하니 중개종곡(中開鍾谷)이라 실운과축(悉云過軸)이고 사직 김공(司直金公)은 독신성인(篤信聖人)이라 강명의리(講明義理)하고 부운영리(浮雲榮利)라 추태명교(芻泰名敎)이라 현우함복조야추중(賢愚咸服朝野推重)하나 불부군소(不赴君召)하고 지재고상(志在高尚)하니 구도(求道)에서 임장종신불기(林獎從身不起)하고 초자현손(肖子賢孫)들은 세수구지(世守舊址)에다가 일초일목(一草一木)도 상광소피(祥光所被)라 종산종수(鍾山鍾水)에 장루유기차(杖屢攸旣且)하고 상재유경갱(桑梓猶敬羹) 장합모(牆盍慕) 견비갱신(堅碑更新)하니 후손첨송다사긍식(後孫瞻誦多士矜式)을 공지유택(公之幽宅)은 구룡지천(九龍之阡)이다.

 

기원(紀元) 4231년(1998년) 무인(戊寅) 3월    일

밀양김씨대종회(密陽金氏大宗會) 경주김씨종친회본문(慶州金氏宗親會本文)을 제공(提供)

 

 

p01.png 밀양김씨 본관유래(密陽金氏本貫由來)

밀양김씨(密陽金氏) 시조(始祖) 김승조(金承祖) 초명(初名) 김식(金軾) 자(字)는 창종(昌鍾) 호(號)는 홍의(弘毅) 관직(官職)은 사직(司直)이시다.(즉 법무관(法務官), 정5품(正五品)) 고려 원종조(元宗朝) 때에 몽고 호(胡)나라와 왜군(倭軍:일본(日本))에게 침입(侵入) 당하자, 국내는 혼란 사태 속에 강화도(江華島)로 환도 후(還都後) 특별부대인 삼별초(三別抄:야(夜)ㆍ좌(左)ㆍ우(右)ㆍ신의군(神義軍))가 반란(反亂)을 일으킨 사건(事件)이 발생하자 원종(元宗) 12年(1271년 1월)에 명장(名將) 김방경(金方慶:구(舊). 안동인(安東人))의 막하장(幕下將)으로 자원(自願) 출전(出戰)하여 삼별초 난을 평정(平定)시킨 큰 공적(功績)을 세우자 낭장(郎將)에서 사직(司直)으로 특진과 동시에 밀성군(密城君)에 봉작(封爵)되고 밀성김씨(密城金氏)로 관향(貫鄕)을 하사(下賜) 받으시고 관시조(貫始祖)가 되시니, 후손들은 본관(本貫)을 밀양(密陽:고호(古號) 밀성(密城)) 김씨(金氏)로 혈통(血統)을 이어 계보(系譜)를 이루고 있다.

 

먼저 경상남도 밀양시는 본래 삼국시대에 추화(推火)군인데, 신라국 경덕왕(景德王) 750년 때에 밀성(密城)군으로 고쳤다가, 고려조 성종왕(成宗王) 981년 때에 밀주경사(密州京史)로 하였고, 현종왕(顯宗王) 1018년 때는 밀성군사(密城郡事)로 개칭하였으며, 공민왕(恭愍王) 1360년의 증조(曾祖) 할머니 박씨(朴氏)의 고향이라 하여 밀성부(密城府)로 높였다.고려조 공양왕(恭讓王) 1390년 때에는 밀성부(密城府)를 밀양군(密陽郡)으로 개칭되었다. 조선조 태조(太祖) 1393년에 밀성군으로 고쳤으나 그 후, 곧바로 밀양부로 개칭하였다. 고종왕(高宗王) 1895년 때에 군(郡)으로 격하(格下)되어 오늘에 이르다가 1993년에 밀양시(密陽市)로 승격되었다.

※ 신라국의 옛 이름은 서라벌(徐羅伐) 시림(始林) 계림(鷄林) 경주(慶州) 지금의 경주시(慶州市)이다.

 

 

p01.png 밀양김씨본원유사(密陽金氏本源遺事)

우리 밀양김씨(密陽金氏)는 신라대보공(新羅大輔公) 휘(諱) 알지(閼智)의 후예(后裔)로서 세계(世系)는 7세(七世) 미추왕(味鄒王) 8세(八世) 내물왕(奈勿王) 11세(十一世) 지증왕(智證王) 19세(十九世) 원성왕(元聖王) 22세(二十二世) 신무왕(神武王) 23세(二十三世) 원성왕(元聖王) 왕자왕손(王子王孫)으로 신라천년(新羅千年)의 찬란(燦爛)한 역사(歷史)를 이어온 28세(二十八世) 경순대왕(敬順大王) 신라(新羅) 제56대왕(第五十六代王) 김부(金傅)의 제3자(第三子) 명종(鳴鍾) 영분공(永芬公) 경주군(慶州君)의 제13세손(第十三世孫)이신 휘(諱) 김승조(金承祖) 사직공(司直公) 밀성군(密城君)이 우리 밀양김씨(密陽金氏)의 관시조(貫始祖)이시다.

 

시조(始祖) 사직공(司直公) 밀성군(密城君)께서는 경주김씨(慶州金氏) 후손(後孫)으로 휘 후덕공(諱候德公:전주내급사(殿主内給事)) 휘 영고(諱永固:열문지후(閱門祗候)) 12세(十二世) 휘 인경(諱仁鏡) 명암공(明庵公) 정숙(貞肅) 평장사(平章事)와 덕흥홍씨(德興洪氏) 경준(景俊)의 딸 사이에서 차자(次子)로 기원(紀元) 三五六二年 서기(西紀) 一二二九年 기축(己丑) 고종(高宗) 16년(十六年) 8월(八月) 14일(十四日) 경상도(慶尚道) 경주(慶州)골에서 탄신(誕辰)하시였다. 용모(容貌)가 기이(奇異)하신 공(公)께서는 성품(性品)이 강직(剛直)하였고 소년시절(少年時節)에 부모님(父母任)의 엄격(嚴格)한 정훈(庭訓)에서 학문(學問)의 기초(基礎)를 닦아 성장(成長)함에 천성중후(天性重厚)하고 유달리 총명(聰明)하고 충효(忠孝)의 절의(節義)와 제세(濟世)에 뛰어나 칭송(稱頌)이 자자(自恣)하신 공(公)께서 안동(安東) 김방경 선생(金方慶先生)의 문하(門下)에서 수학(修學)하면서 심오(深奥)한 뜻을 물어서 학문(學問)을 수업(授業)하고 특(特)히 병술(兵術)에는 비범(非凡)이 뛰어나시고 활(弓)쏘기에 명궁(名弓)이셨다. 선비로서 자세(姿勢)를 갖추고 있을 쯤에 고려조(高麗朝)에서 낭장(郞將)의 벼슬길에 오르셨다.

 

 

 

기원(紀元) 3580년(서기 1247년) 정미(丁未) 1월에 김해김씨(金海金氏) 경유(鏡裕) 직장(直長)의 딸을 배필(配匹)로 맞이하여 휘 혁(諱赫:일명(一名) 숙신(叔臣)) 찬성사(贊成事) 손(孫) 휘 희천(諱禧天) 검열관(檢閱官) 5세(五世) 휘 영추(諱英秋) 공부시랑(工副侍郞)께서 호남지방(湖南地方)에 세거(世居)하면서 혈통(血統)을 계승(繼承)하였고 휘 봉상판관(諱奉常判官) 경양공(京陽公)은 경기(京畿) 충청지방(忠清地方)에 6세(六世) 광석(廣碩) 밀양부사(密陽府使)께서는 함경도(咸鏡道) 평안도(平安道) 황해도(黃海道) 강원도(江原道) 지방(地方)에 8세(八世) 윤택(潤澤) 진사(進士) 도사판관(都事判官)께서는 경기도(京畿道) 포천지방(抱川地方)에 8세(八世) 홍준(弘濬) 한성부윤(漢城府尹)께서는 충청도(忠清道)에 기타지(其他地)에 이어 혈통(血統)이 계승(繼承)되어 후손(後孫)들이 번창(繁昌)하여 국가(國家)와 사회(社會)에서 관직(官職)에 공신(功臣)이 많이 배출(輩出)되고 있다.

 

기원 3603년(서기 1270년) 경오(庚午:원종(元宗) 11년) 6월에 고려장군(高麗將軍) 배중손(裵仲孫)은 고려조(高麗朝)가 개경(開京)에 환도(還都:강화도(江華島)에 피신 당시)하여 몽고(蒙古:오랑캐 북호(北胡)) 침입군(侵入軍)에 굴복(屈伏)하는 것을 반대(反對)하고 강화도(江華島)에서 일대반란(一大反亂)을 일으켰으니 이것이 저 유명(有名)한 삼별초(三別抄:좌(左)ㆍ우(右)ㆍ신(神))의 난(亂)이 전국(全國)을 휩쓸고 걷잡을 수 없이 각처(各處)에서 관료(官僚)들이 호응(呼應)하고 협세(挾勢)함으로써 일부(一部)에서는 살인방화(殺人放火)가 자행(恣行)되고 있는 난(亂)은 경상도(慶尚道) 제주도(濟州道) 전라도(全羅道) 진도(珍島)까지 반란군(反亂軍)이 지열(地熱)하여 약(若) 3년간 계속(繼續)된 사건(事件)이다.

이때 낭장(郞將) 김승조공(金承祖公)께서 의병(義兵)을 모집(募集)하여 김방경장군(金方慶將軍)의 막장(幕將)으로 자원(自願)하여 의병장(義兵將)이 되시어 전투(戰闘)에 출정(出征)하자 연전연승(連戰連勝)으로 반란군(叛亂軍)을 섬멸(殲滅)하고 평정(平定)시키고 대공(大功)을 세우시니 공(公)의 의병군(義兵軍)을 초승군(超乘軍)이라 일컬었고 기원 3604년(서기1271년) 원종(元宗) 12년 1월에 익호장군(翼虎將軍)이라 칭호(稱號)를 받고 그 시절(時節)에는 밀성(密城:밀양) 지방(地方)은 삼별초(三別抄)가 자주 출몰(出沒)한 지역(地域)이라(고려사(高麗史)는 밀성(密城)의 반란(反亂)을 이렇게 적고 있다. ‘밀성군인(密城郡人) 방보 등 5명(方甫等五名)은 부사(府使) 이이(李頤)를 죽였다’라고) 관료(官僚)들도 호응(呼應)하고 있다는 첩문(牒文)을 접(接)한 고려조정(高麗朝廷)에서는 의병장(義兵將) 김승조(金承祖) 낭장(郞將)께 명(命)하사 밀성(密城)고을에 출정(出征)하라 하였다.

 

 

 

공(公)은 의병군(義兵軍)을 거느리고 전주방어사(全州防禦使) 김구(金瞘) 경주판관(慶州判官) 엄수(嚴守)가 병졸(兵卒)을 이끌고 연합(聯合) 작전(作戰)하여 급(急)히 이르자 천등(阡等)도 합세(合勢)하여 반란두목 방보 등(反亂頭目方甫等)을 목 베이고 잔당(殘黨)을 항복(降伏)받고 밀성(密城)고을이 마침내 평정(平定)되자 고을 사람들은 기뻐하였다고 한다. 공(公)께서 큰 공(功)을 세우자 고려(高麗) 원종왕(元宗王)께서 가상(嘉尚)하시고 사직(司直)의 관직(官職)과 밀성군(密城君)으로 봉(封)하시고 시호(諡號)를 홍의제(弘毅齊)라 하사(下賜)하시자 시조(始祖) 사직공(司直公) 밀성군(密城君)께서는 본 경주(本慶州)에서 밀성(密城:밀양(密陽))으로 분관(分貫)하게 되자 후손(後孫)들은 본관(本貫)을 밀양(密陽)으로 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또한 “불능실기(不能悉記:불가능한 실기)” 승조공(承祖公)은 여고지지효안자지락(與考之志效顏子之樂)이시고 모화하지문물(慕華夏之文物)이시고 개백세지현송산증중청(開百世之絃誦山增重清)하고 향지인사(鄕地人士)이고 출입회황자(出入徊徨者)이시고 역시(亦是) 무촉흥감(撫躅興感)하고 이애지여영광공벽(而愛之如靈光拱璧)이시고 즉비지고야(則碑之固也)는 연구유비(然舊有碑)라 12세손(十二世孫) 부사(府使)는 가기기(可幾記)를 사자(使子) 참판(叅判) 덕민서(德民書)이나 지우금(至于今)은 자진만환(字盡漫槵)되어 불가독(不可讀)이라 고후손(故後孫)은 구유촉지잉민(懼遺躅之仍泯)하고 개석중각(改石重刻)하니 이도불후어구원야(以圖不朽於久遠也)라 희(噫)고 공몰(公沒)되 태오백여리(殆五百餘裡)되니 기류풍여운(其流風餘韻)이나 구이불참(久而不斬)하나 산천정채초목광화(山川精彩草木光華)이고 의구시장(依舊是藏)하고 수지소(修之所)는 이초예승승(而肖裔繩繩)하여 세수기지(世守其址)하고 일심제성(一心齊誠)하여 구적복천(舊跡復闡)하나 개비(豈非) 공지덕지심(公之德之深)이고 극창궐후어무궁자호(克昌厥後於無窮者乎)이라 내위지명(乃爲之銘)이 왈명악올올(曰明岳屼屼)마다 암석촉촉삭(岩石矗矗削)여 금열병(金列屏)하니 중개종곡(中開鍾谷)이라 실운과축(悉云過軸)이고 사직 김공(司直金公)은 독신성인(篤信聖人)이라 강명의리(講明義理)하고 부운영리(浮雲榮利)라 추태명교(芻泰名敎)이라 현우함복조야추중(賢愚咸服朝野推重)하나 불부군소(不赴君召)하고 지재고상(志在高尚)하니 구도(求道)에서 임장종신불기(林獎從身不起)하고 초자현손(肖子賢孫)들은 세수구지(世守舊址)에다가 일초일목(一草一木)도 상광소피(祥光所被)라 종산종수(鍾山鍾水)에 장루유기차(杖屢攸旣且)하고 상재유경갱(桑梓猶敬羹) 장합모(牆盍慕) 견비갱신(堅碑更新)하니 후손첨송다사긍식(後孫瞻誦多士矜式)을 공지유택(公之幽宅)은 구룡지천(九龍之阡)이다.

 

기원(紀元) 4231년(1998년) 무인(戊寅) 3월    일

밀양김씨대종회(密陽金氏大宗會) 경주김씨종친회본문(慶州金氏宗親會本文)을 제공(提供)

 

 

p01.png 밀양김씨 본관유래(密陽金氏本貫由來)

밀양김씨(密陽金氏) 시조(始祖) 김승조(金承祖) 초명(初名) 김식(金軾) 자(字)는 창종(昌鍾) 호(號)는 홍의(弘毅) 관직(官職)은 사직(司直)이시다.(즉 법무관(法務官), 정5품(正五品)) 고려 원종조(元宗朝) 때에 몽고 호(胡)나라와 왜군(倭軍:일본(日本))에게 침입(侵入) 당하자, 국내는 혼란 사태 속에 강화도(江華島)로 환도 후(還都後) 특별부대인 삼별초(三別抄:야(夜)ㆍ좌(左)ㆍ우(右)ㆍ신의군(神義軍))가 반란(反亂)을 일으킨 사건(事件)이 발생하자 원종(元宗) 12年(1271년 1월)에 명장(名將) 김방경(金方慶:구(舊). 안동인(安東人))의 막하장(幕下將)으로 자원(自願) 출전(出戰)하여 삼별초 난을 평정(平定)시킨 큰 공적(功績)을 세우자 낭장(郎將)에서 사직(司直)으로 특진과 동시에 밀성군(密城君)에 봉작(封爵)되고 밀성김씨(密城金氏)로 관향(貫鄕)을 하사(下賜) 받으시고 관시조(貫始祖)가 되시니, 후손들은 본관(本貫)을 밀양(密陽:고호(古號) 밀성(密城)) 김씨(金氏)로 혈통(血統)을 이어 계보(系譜)를 이루고 있다.

 

먼저 경상남도 밀양시는 본래 삼국시대에 추화(推火)군인데, 신라국 경덕왕(景德王) 750년 때에 밀성(密城)군으로 고쳤다가, 고려조 성종왕(成宗王) 981년 때에 밀주경사(密州京史)로 하였고, 현종왕(顯宗王) 1018년 때는 밀성군사(密城郡事)로 개칭하였으며, 공민왕(恭愍王) 1360년의 증조(曾祖) 할머니 박씨(朴氏)의 고향이라 하여 밀성부(密城府)로 높였다.고려조 공양왕(恭讓王) 1390년 때에는 밀성부(密城府)를 밀양군(密陽郡)으로 개칭되었다. 조선조 태조(太祖) 1393년에 밀성군으로 고쳤으나 그 후, 곧바로 밀양부로 개칭하였다. 고종왕(高宗王) 1895년 때에 군(郡)으로 격하(格下)되어 오늘에 이르다가 1993년에 밀양시(密陽市)로 승격되었다.

※ 신라국의 옛 이름은 서라벌(徐羅伐) 시림(始林) 계림(鷄林) 경주(慶州) 지금의 경주시(慶州市)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