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시군 건치연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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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高陽)이란 행정구역명칭(行政區域名稱)이 처음 등장한 것은 조선(朝鮮) 태종(太宗) 13년(1413)에 고봉(高峰)ㆍ덕양(德陽) 두 현(縣)의 앞자와 뒷자를 따서 고양(高陽)으로 고치고 현감(縣監)을 설치하였던 데에서 연유한다. 이때 고양(高陽)은 고봉(高峰)과 덕양(德陽:행주(幸州)) 뿐만 아니라 부원(富原)과 황조(荒調)도 합병하였다. 그러나 고양지역(高陽地域)에 우리 조상(祖上)들이 정착한 것은 역사시대(歷史時代) 이전으로 올라간다. 민족문화(民族文化)의 젖줄인 한강(漢江)을 남으로 하고 광주산맥(廣州山脈) 북한산(北漢山) 준령을 동으로 하여 서쪽ㆍ북쪽으로 넓은 평야가 펼쳐져 있는 고양군(高陽郡)은 일찍이 선인(先人)들의 생활터전이었고 문화발상지(文化發祥地)였다. 즉 고양군내(高陽郡內) 지영리(芝英里)ㆍ가자동(加紫洞)ㆍ오부자동(五富子洞) 등의 산포지에서 출토된 선사유물(先史遺物)은 이미 선사시대(先史時代)인 신석기문화(新石器文化)가 이 땅에 전개될 때부터 우리 조상들의 생활터전이었음을 여실히 증명해주고 있다.

 

 

 

고양군일대(高陽郡一帶)가 역사무대(歷史舞臺)에 등장하기 시작한 것 또한 오랜 것으로 백제(百濟)가 한강유역(漢江流域)을 중심으로 고대국가(古代國家)로의 성장 발전과정에서 그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백제(百濟)는 부여계(扶餘系) 북방유이민집단(北方流移民集團)에 의해 삼각산하(三角山下) 하북위례성(河北慰禮城)에 처음 도읍(都邑)하고 한강유역일대(漢江流域一帶)를 경략하면서 세력권을 확대하였다. 이어 하남위례성(河南慰禮城)으로 도읍(都邑)을 옮기고 이미 한강하구(漢江河口) 및 인천지방해안(仁川地方海岸)에 세력을 떨치고 있던 미추홀(彌鄒忽) 비류집단(沸流集團)을 복속시킨 위세를 몰아 북으로 예성강(禮成江) 상류, 동으로 춘천지방(春川地方), 남으로 공주지방(公州地方)까지 그 영역(領域)으로 하였다. 한편 백제(百濟)를 건국한 주요 지배계층들은 북방으로부터 황해도(黄海道) 지방을 거쳐 한강유역(漢江流域)에 정착하였던 것으로 그 과정 속에서 지리적으로 반드시 고양군일대(高陽郡一帶)를 경유 또는 선정착지(先定着地)로 삼았음은 당연한 사실이라 할 수 있다. 또한 백제(百濟)가 인근 유이민집단을 결합하여 연맹국가(聯盟國家)를 형성하고 도성(都城)을 중심으로 동서남북(東西南北)의 4부(四部)로 행정구역을 분할할 때 고양군일대(高陽郡一帶)는 북부(北部)에 해당한다 할 수 있으며, 이곳에는 부여계(夫餘系)인 해루집단(解婁集團)과 진씨집단(眞氏集團)이 일정한 세력을 가지고 존재하였으며, 이들은 백제(百濟) 왕족(王族) 다음가는 귀족집단으로서 왕비족(王妃族)으로도 등장되곤 하였다.

 

아울러 근초고왕(近肖古王)ㆍ근구수왕대(近仇首王代)의 해외경략(海外經略) 및 고구려(高句麗) 침공 등 국력(國力)을 떨쳤을 당시 고양군일대(高陽郡一帶)는 그 세력 확대의 길목으로서 중요한 전략적(戰略的)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음은 생각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백제(百濟)의 지방통치(地方統治)로서의 고양군일대(高陽郡一帶) 경영에 대한 기록이 전혀 없는 것이 안타깝기만 하다.

한편 백제건국후(百濟建國後) 400여년 고구려(高句麗)의 광개토왕(廣開土王)과 장수왕(長壽王)의 남진정책(南進政策)에 의해 백제(百濟)는 고구려와의 싸움에서 제21대 개로왕(蓋鹵王)이 아차산성(阿且山城)에서 전사하자 그의 아들 문주왕(文周王)이 왕위를 이어 웅진(熊津)으로 남천(南遷)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한강유역일대(漢江流域一帶)는 고구려(高句麗)의 관할 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당시 남북(南北)으로 세력을 확대하던 고구려(高句麗)는 지방에 군현제(郡縣制)를 실시하여 현재 고양군관내(高陽郡管內)의 고봉(高峰)에는 달을성현(達乙省縣)을, 행주(幸州)에는 개백현(皆白縣)을 설치하였다. 그리고 지금의 서울지방에는 북한산군(北漢山郡)을 설치하고 남평양(南平壤)이라 호칭하면서 한강유역(漢江流域)의 군현(郡縣)을 중심으로 백제(百濟)ㆍ신라(新羅)를 경략하는 거점으로 삼았던 것이다. 그 후 고구려(高句麗)는 한강유역일대(漢江流域一帶)를 77년간 경략하였으나 백제(百濟)ㆍ신라(新羅)의 공동작전(共同作戰)에 의해 그 통치권은 백제(百濟)에 이어 신라(新羅)로 넘어가게 되었다. 즉 신라(新羅) 제24대 진흥왕(眞興王:540~575) 때에 백제(百濟)와의 연합작전으르 고구려(高句麗)의 세력을 한강유역(漢江流域)으로부터 몰아내고 진흥왕(眞興王) 16년(555)에 북한산(北漢山)에 친행(親幸)하여 강역을 정하고 또 순수비(巡狩碑)를 세웠다. 이로부터 고양군일대(高陽郡一帶) 및 서울지역은 신라(新羅)의 대북방(對北方) 방어진지 또는 전초기지로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신라(新羅)는 삼국통일(三國統一) 이후 새로 영유하게 된 구백제(舊百濟) 땅에 웅주(熊州)ㆍ전주(全州)ㆍ무주(武州)를, 대동강(大同江) 이남의 고구려(高句麗) 땅에 한주(漢州)ㆍ삭주(朔州)ㆍ명주(溟州)를, 신라지역(新羅地域)과 옛 가야(伽倻) 땅에 상주(尙州)ㆍ양주(良州)ㆍ강주(康州)를 설치하여 전국을 9주(九州)로 재편성하였다. 그리고 수도(首都)인 경주(慶州) 이외에 전국 주요지역에는 오소경(五小京)을 설치하였다. 이러한 신라(新羅)의 9주5소경(九州五小京)의 지방행정구역(地方行政區域) 편제에 있어서 지금의 고양군일대(高陽郡一帶)는 646년에 설치된 한산주(漢山州)에 편입되었다. 이 때 한산주(漢山州)의 관할구역은 대체로 지금의 서울ㆍ고양군일대(高陽郡一對)이다.

 

 

고양(高陽)이란 행정구역명칭(行政區域名稱)이 처음 등장한 것은 조선(朝鮮) 태종(太宗) 13년(1413)에 고봉(高峰)ㆍ덕양(德陽) 두 현(縣)의 앞자와 뒷자를 따서 고양(高陽)으로 고치고 현감(縣監)을 설치하였던 데에서 연유한다. 이때 고양(高陽)은 고봉(高峰)과 덕양(德陽:행주(幸州)) 뿐만 아니라 부원(富原)과 황조(荒調)도 합병하였다. 그러나 고양지역(高陽地域)에 우리 조상(祖上)들이 정착한 것은 역사시대(歷史時代) 이전으로 올라간다. 민족문화(民族文化)의 젖줄인 한강(漢江)을 남으로 하고 광주산맥(廣州山脈) 북한산(北漢山) 준령을 동으로 하여 서쪽ㆍ북쪽으로 넓은 평야가 펼쳐져 있는 고양군(高陽郡)은 일찍이 선인(先人)들의 생활터전이었고 문화발상지(文化發祥地)였다. 즉 고양군내(高陽郡內) 지영리(芝英里)ㆍ가자동(加紫洞)ㆍ오부자동(五富子洞) 등의 산포지에서 출토된 선사유물(先史遺物)은 이미 선사시대(先史時代)인 신석기문화(新石器文化)가 이 땅에 전개될 때부터 우리 조상들의 생활터전이었음을 여실히 증명해주고 있다.

 

 

 

고양군일대(高陽郡一帶)가 역사무대(歷史舞臺)에 등장하기 시작한 것 또한 오랜 것으로 백제(百濟)가 한강유역(漢江流域)을 중심으로 고대국가(古代國家)로의 성장 발전과정에서 그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백제(百濟)는 부여계(扶餘系) 북방유이민집단(北方流移民集團)에 의해 삼각산하(三角山下) 하북위례성(河北慰禮城)에 처음 도읍(都邑)하고 한강유역일대(漢江流域一帶)를 경략하면서 세력권을 확대하였다. 이어 하남위례성(河南慰禮城)으로 도읍(都邑)을 옮기고 이미 한강하구(漢江河口) 및 인천지방해안(仁川地方海岸)에 세력을 떨치고 있던 미추홀(彌鄒忽) 비류집단(沸流集團)을 복속시킨 위세를 몰아 북으로 예성강(禮成江) 상류, 동으로 춘천지방(春川地方), 남으로 공주지방(公州地方)까지 그 영역(領域)으로 하였다. 한편 백제(百濟)를 건국한 주요 지배계층들은 북방으로부터 황해도(黄海道) 지방을 거쳐 한강유역(漢江流域)에 정착하였던 것으로 그 과정 속에서 지리적으로 반드시 고양군일대(高陽郡一帶)를 경유 또는 선정착지(先定着地)로 삼았음은 당연한 사실이라 할 수 있다. 또한 백제(百濟)가 인근 유이민집단을 결합하여 연맹국가(聯盟國家)를 형성하고 도성(都城)을 중심으로 동서남북(東西南北)의 4부(四部)로 행정구역을 분할할 때 고양군일대(高陽郡一帶)는 북부(北部)에 해당한다 할 수 있으며, 이곳에는 부여계(夫餘系)인 해루집단(解婁集團)과 진씨집단(眞氏集團)이 일정한 세력을 가지고 존재하였으며, 이들은 백제(百濟) 왕족(王族) 다음가는 귀족집단으로서 왕비족(王妃族)으로도 등장되곤 하였다.

 

아울러 근초고왕(近肖古王)ㆍ근구수왕대(近仇首王代)의 해외경략(海外經略) 및 고구려(高句麗) 침공 등 국력(國力)을 떨쳤을 당시 고양군일대(高陽郡一帶)는 그 세력 확대의 길목으로서 중요한 전략적(戰略的)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음은 생각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백제(百濟)의 지방통치(地方統治)로서의 고양군일대(高陽郡一帶) 경영에 대한 기록이 전혀 없는 것이 안타깝기만 하다.

한편 백제건국후(百濟建國後) 400여년 고구려(高句麗)의 광개토왕(廣開土王)과 장수왕(長壽王)의 남진정책(南進政策)에 의해 백제(百濟)는 고구려와의 싸움에서 제21대 개로왕(蓋鹵王)이 아차산성(阿且山城)에서 전사하자 그의 아들 문주왕(文周王)이 왕위를 이어 웅진(熊津)으로 남천(南遷)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한강유역일대(漢江流域一帶)는 고구려(高句麗)의 관할 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당시 남북(南北)으로 세력을 확대하던 고구려(高句麗)는 지방에 군현제(郡縣制)를 실시하여 현재 고양군관내(高陽郡管內)의 고봉(高峰)에는 달을성현(達乙省縣)을, 행주(幸州)에는 개백현(皆白縣)을 설치하였다. 그리고 지금의 서울지방에는 북한산군(北漢山郡)을 설치하고 남평양(南平壤)이라 호칭하면서 한강유역(漢江流域)의 군현(郡縣)을 중심으로 백제(百濟)ㆍ신라(新羅)를 경략하는 거점으로 삼았던 것이다. 그 후 고구려(高句麗)는 한강유역일대(漢江流域一帶)를 77년간 경략하였으나 백제(百濟)ㆍ신라(新羅)의 공동작전(共同作戰)에 의해 그 통치권은 백제(百濟)에 이어 신라(新羅)로 넘어가게 되었다. 즉 신라(新羅) 제24대 진흥왕(眞興王:540~575) 때에 백제(百濟)와의 연합작전으르 고구려(高句麗)의 세력을 한강유역(漢江流域)으로부터 몰아내고 진흥왕(眞興王) 16년(555)에 북한산(北漢山)에 친행(親幸)하여 강역을 정하고 또 순수비(巡狩碑)를 세웠다. 이로부터 고양군일대(高陽郡一帶) 및 서울지역은 신라(新羅)의 대북방(對北方) 방어진지 또는 전초기지로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신라(新羅)는 삼국통일(三國統一) 이후 새로 영유하게 된 구백제(舊百濟) 땅에 웅주(熊州)ㆍ전주(全州)ㆍ무주(武州)를, 대동강(大同江) 이남의 고구려(高句麗) 땅에 한주(漢州)ㆍ삭주(朔州)ㆍ명주(溟州)를, 신라지역(新羅地域)과 옛 가야(伽倻) 땅에 상주(尙州)ㆍ양주(良州)ㆍ강주(康州)를 설치하여 전국을 9주(九州)로 재편성하였다. 그리고 수도(首都)인 경주(慶州) 이외에 전국 주요지역에는 오소경(五小京)을 설치하였다. 이러한 신라(新羅)의 9주5소경(九州五小京)의 지방행정구역(地方行政區域) 편제에 있어서 지금의 고양군일대(高陽郡一帶)는 646년에 설치된 한산주(漢山州)에 편입되었다. 이 때 한산주(漢山州)의 관할구역은 대체로 지금의 서울ㆍ고양군일대(高陽郡一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