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양김씨 상계유사세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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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01.png 1. 계림(雞林)

김씨(金氏)의 발상지(發祥地). 전설(傳說)에 따르면 신라(新羅) 제4대 석탈해왕(昔脫解王) 9년(서기 65년) 3월 어느 날 시림(始林) 숲속에서 밤중에 닭의 울음소리를 듣고 날이 밝자 호공(瓠公)을 보내어 살피게 하였더니, 금 빛깔의 조그마한 궤짝이 나뭇가지에 걸려있는데 흰 닭 한 마리가 그 밑에서 울고 있었다.

호공(瓠公)이 돌아와 왕(王)에게 이 사실(事實)을 아뢰니 왕(王)이 그 궤짝을 가져오게 하여 궤짝을 열어보니 그 안에는 용모(容貌)가 기이(寄異)하게 뛰어난 사내아이가 들어있었다. 왕(王)은 하늘이 보낸 아이라고 크게 기뻐하고 거두어 기르고, 그 숲을 닭이 울었다고 하여 계림(雞林)으로 고치고, 나라이름도 계림(雞林)으로 고쳤다.

이 아이의 이름을 알지(閼智)라 하였으며, 금궤(金檟)에서 나왔으므로 그 자손(子孫)들을 김씨(金氏)라 불렀다고 한다.

아무튼 이 계림(雞林)은 우리 김씨부족(金氏部族)이 웅거(雄據)하여 왕가(王家)로의 기반(基盤)을 닦은 신성(神聖)한 터이다.

신라(新羅) 사람들이 닭을 신성시(神聖視)하는 것도 계림(雞林) 관계인 것 같다.

‘김씨(金氏)라는 성(姓)은 신성(神聖)하고, 왕(王)이라는 뜻이다’라는 새로운 해석(解釋)이 유력(有力)하여진다.

 

 

 

p01.png 2. 계림(雞林) 비각(碑閣)

계림(雞林) 안에 있는 이 비각(碑閣)은 조선순조계해(朝鮮純祖癸亥:1803년) 11월에 세운 것이다.

참봉(叅奉) 김성걸(金成杰)의 청(請)으로 규장각직제학(奎章閣直提學) 남공철(南公轍)이 비문(碑文)을 쓴 비(碑)를 모셨는데, 이 비(碑)는 계림(雞林)의 내력(來歷)과 신라김씨왕실(新羅金氏王室)의 치적(治蹟)을 적은 다음

‘苑彼雞林 興王之基 孰敢不敬 我銘在碑’

(저 계림(雞林)의 동산 숲 왕업(王業)을 일으킨 터이니 누가 감(敢)히 우러르지 않으리 나 이 비(碑)에 새기노라)고 명(銘)하였다.

이 비각(碑閣)은 문화재(文化財)로서 당국(當局)에서 관리(管理)한다.

 

 

 

p01.png 3. 계림(雞林) 세묘(世廟)

경주(慶州) 숭혜전(崇惠殿) 앞에 있는 시조묘(始祖廟)에는 시조대왕 휘 알지(始祖大王諱閼智)를 모신 곳이다.

 

상향축문(常享祝文)

‘雞林大輔公伏以德被生靈功安社稷繼作名師世傳千億維季春謹以牲幣禮齊粢盛庶品式陳明薦尙饗’

 

 

 

p01.png 4. 숭혜전(崇惠殿)

숭혜전(崇惠殿)은 신라 제13대 미추왕(新羅第十三代味鄒王)과, 제30대 문무왕(第三十代文武王)과 제56대(第五十六代) 경순왕(敬順王)의 위패(位牌)를 모신 곳이다.

미추왕(味鄒王)은 우리 김씨(金氏)로서는 처음으로 왕위(王位)에 오르신 왕(王)이시며, 문무왕(文武王)은 삼국통일(三國統一)을 이룩하신 성주(聖主)이시고, 경순왕(敬順王)은 백성(百姓)을 지극(至極)히 사랑하사 평화통일(平和統一)을 위하여 나라를 고려 태조(高麗太祖)에게 손위(遜位)하신 왕(王)이시다.

1723년에 편액(扁額)이 하사(下賜)되고 전참봉(殿叅奉)을 두기 시작하였다.

원래(元來)에는 경순왕(敬順王)만 모셔왔는데 1887년에 미추왕(味鄒王)과 문무왕(文武王)을 같이 모셨다. 이 해에 경주부윤(慶州府尹) 金철회로 하여금 5간(間)을 더 늘려 짓고 숭혜전(崇惠殿)이라 이름하였다.

주벽은 미추왕(主壁 味鄒王)

동벽은 문무왕(東壁 文武王)

서벽은 경순왕(西壁 敬順王)

춘향제(春享祭)는 춘분일(春分日)

추향제(秋享祭)는 추분일(秋分日)

대제일(大祭日)은 동짓날(冬至日)

매월삭망분향(每月朔望焚香)을 하고 있다.

 

 

 

p01.png 5. 미추왕릉(味鄒王陵)

미추왕(味鄒王)은 262년에 우리 김씨(金氏)로서는 최초(最初)로 왕위(王位)에 오르셨고, 23년간(年間) 재위(在位)하셨다. 백제(百濟)의 침입(侵入)을 5회(回)나 막고 중농정책(重農政策)과 인정(仁政)을 베푸셨다. 이 능(陵)을 죽현릉(竹現陵) 또는 죽릉(竹陵)이라고도 한다.

유례왕(儒禮王) 14년에 이서국(伊西國)의 군사(軍士)들이 침입하여 왔을 때 이를 막지 못하고 있는데 홀연(忽然) 머리에 댓잎(竹葉)을 꽂은 수많은 군사(軍士)가 와서 적(敵)을 막은 다음 사라졌고, 댓잎(竹葉)만이 미추왕릉(味鄒王陵)에 쌓였다고 한다.

이는 미추왕(味鄒王)께서 음병(蔭兵)을 보내시어 적병(敵兵)을 막으셨다 하여 죽현릉(竹現陵)이라 부르게 되었다.

 

 

 

p01.png 6. 내물왕릉(奈勿王陵)

신라 제17대 내물왕(新羅第十七我奈勿王)은 일명(一名) 내밀왕(奈密王)이라고도 하는데 미추왕(味鄒王)의 조카(侄)이시며 또 사위(婿)이시다. 미추왕(味鄒王)의 딸 보반부인(保反夫人)과의 사이에서 눌지왕(訥祗王)을 낳으셨다. 우리 직계조상(直系祖上)으로서는 최초(最初)로 왕위(王位)에 오르셨다. 356년부터 402년까지 왕위(王位)에 계셨으며, 두 차례에 걸친 왜구(倭寇)와 말갈군(靺鞨軍)을 대파(大破)하셨고, 정(善政)을 베풀어 백제(百濟)에서 귀화(歸化)하는 이가 많았다. 능(陵)은 계림(雞林) 뒤에 모셔있다.

 

 

 

p01.png 7. 천마총(天馬塚)

이곳은 국토통일(國土統一)의 기상(氣像)이 넘치고 민족문화(民族文化)가 찬란(燦爛)하게 꽃핀 신라(新羅)의 천년고도(千年古都) 서라벌(徐羅伐)의 옛 터다. 이 천마총(天馬塚)은 약 1,500년 전의 왕릉(王陵)으로 추정(推定)하고 있다.

불교(佛敎)가 전래(傳來)될 당시(當時) 다른 왕(王)들의 누운 위치(位置)의 상체(上體)가 북쪽으로 향(向)하였던 것이 이 왕(王)의 상체(上體)는 동쪽을 향(向)하고 있는 점(點)이 특색(特色)이다. 특(特)히 왕관(王冠), 혁대(革帶) 등 장신구(裝身具)들이 유별(類別)나게 큰 것으로 보아 팔척장신(八尺長身)이셨던 지증왕릉(智證王陵)으로 추정(推定)하고 있다. 이 능(陵)의 윗부분(部分)에서 말의 안장과 하늘을 날을 듯한 천마(天馬)의 그림이 나왔다고 하여 천마총(天馬塚)이라 한다.

 

 

 

p01.png 8. 원성왕릉(元聖王陵,괘릉(掛陵)

신라(新羅) 제38대왕으로서 휘는 경신(諱敬信), 내물왕(奈勿王)의 12세손(世孫), 혜공왕 말년(惠恭王末年)에 반란(叛亂)을 평정(平定)하신 공(功)이 있어, 상대등(上大等)이 되었다가 선덕왕(宣德王)의 뒤를 이어 785년에 즉위(卽位)하자 고조(高祖) 이하(以下)를 왕(王)에 추봉(追封)하시고, 788년에는 독서출신과(讀書出身科)를 두어 인재(人材)를 선발(選拔)하셨고, 790년에는 벽골제(碧骨堤)를 증축(增築)하여 농사(農事)를 장려(獎勵)하시는 등(等) 798년까지 왕위(王位)에 계셨으니, 문치(文治)로서 선정(善政)을 베푸신 명군(名君)이시다.

지증왕이후(智證王以後) 271년 만에 비로소 우리 직계선조(直系先祖)께서 왕위(王位)에 오르셨으며, 이후(以後) 경순왕(敬順王)까지는 원성왕(元聖王)의 혈손(血孫)이 935년까지 계속(繼續) 왕위(王位)를 이었으므로 경순왕계김씨(敬順王系金氏)로서는 중시조(中始祖)에 해당(該當)하신다. 능(陵)은 경북(慶北) 월성군(月城郡) 외서면(外西面) 괘릉리(掛陵里)에 있다.

 

 

 

p01.png 9. 신무왕릉(神武王陵)

신라(新羅) 제45대왕 휘는 우징(諱佑徵)이시니 원성왕(元聖王)의 증손(曾孫)이시다.

우리 직계선조(直系先祖)로서 혁명(革命)을 일으켜 숙적(宿敵)인 민애왕(閔哀王)을 시(弑)하고 839년에 즉위(卽位)하셨다. 그러나 1년을 못 채우시고 병환(病患)으로 돌아가셨다. 능(陵)은 경주(慶州) 제형산(弟兄山)에 있다.

 

 

 

p01.png 10. 문성왕릉(文聖王陵)

신라(新羅) 제46대왕 휘는 경응(諱慶應)으로 신무왕(神武王)의 태자(太子)요, 어머님은 정계부인(貞繼夫人)이시다.

비(妃)는 위혼(魏昕)의 딸 우리 직계선조(直系先祖)로서 839년에 왕위(王位)에 오르시어 857년까지 계시는 동안 841년 재위(在位) 3년에 홍필(弘弼)의 반란(反亂) 청해진(靑海鎭)을 근거(根據)로 반란(反亂)을 일으켰으나, 진압(鎭壓)된 사건(事件), 847년에는 양순(良順) 등의 모반(謀叛) 849년에 김식(金式) 등이 모반(謀叛)하는 등 어지러운 시대(時代)였다. 그러나 산동반도(山東半島)에 근거(根據)를 두고 신라(新羅)ㆍ일본(日本)ㆍ당(唐) 세 나라를 상대(相對)로 무역활동(貿易活動)을 하던 궁복(弓福) 장보고(張保皐) 등이 모반(謀叛)하기 전에는 고국(故國)에 돌아와 청해진대사(靑海鎭大使)로부터 청해위군(靑海尉軍)이 되어 해상교통(海上交通)의 통제(統制)를 담당(擔當)하여 당(唐)나라와의 개선(改善)과 사절(使節)의 내왕(來往)이 빈번(頻繁)했다고 한다.

경순왕(敬順王)은 문성왕(文聖王)의 현손(玄孫)이시다.

 

 

 

p01.png 11. 경순왕(敬順王) 영정(影幀)

신라 경순왕(新羅敬順王)은 제56대왕(代王)으로 휘는 부(諱傅)이시다. 897년에 나시어 927년부터 935년까지 왕위(王位)에 계셨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따르면 김씨시조(金氏始祖)인 추존시조대왕 휘 알지(追尊始祖大王諱閼智)의 28세손(世孫)이라 한다.

경애왕(景哀王)의 이종동생(姨從同生)이시고 헌강왕(憲康王)의 외손자(外孫子)로서 경애왕 박씨(景哀王朴氏)의 뒤를 이어 왕위(王位)에 오르셨다. 신라말기(新羅末期)의 국력(國力)은 쇠약(衰弱)하여 도적이 사방(四方)에서 일어나, 궁예(弓裔)와 견훤(甄萱)이 각각(各各) 북쪽과 서쪽에서 나라를 세우고, 서로 신라(新羅)를 침범(侵犯)하여 백성(百姓)은 도탄(塗炭)에 빠졌었다.

 

경애왕(景哀王)이 포석정(飽石亭)에서 놀이하고 있을 때 궁중(宮中)에 쳐들어간 견훤(甄萱)은 경애왕(景哀王)을 죽이고, 경순왕(敬順王)을 왕위(王位)에 오르시게 하였다. 천성(天性)이 어지신 왕(王)께서는 재위(在位) 9년 만에 ‘무고(無辜)한 백성(百姓)으로 하여금 간뇌(間腦)로 땅을 물들이게 함은 나로서는 참을 수 없다’ 하시고 어진 고려왕건태조(高麗王建太祖)에게 나라를 양여(讓與)하시었다. 고려태조왕건(高麗太祖王建)의 맏따님 낙랑공주(樂浪公主)와 재혼(再婚)하시고, 정승상부(政丞尙父)의 칭호(稱號)를 받으시더니 고려경종(高麗景宗) 3년(978) 4월에 돌아가셨다.

 

이 영정(影幀)은 경주(慶州) 숭혜전(崇惠殿)에 모신 영정(影幀)이다. 우의정(右議政) 김사목(金思穆)이 쓴 영정기(影幀記)가 있다.

그 기록(記錄)에 따르면 경순왕영정(敬順王影幀)은 계림(雞林)에 모셔 있었는데, 정유재란(丁酉再乱)때 불에 타버렸다고 한다.

그 뒤 인조(仁祖)때 왕이 후손인 김시양(金時讓)이 경상감사(慶尙監司)로서 영정각(影幀閣) 옛터에 다시 숭혜전(崇惠殿)을 세웠는데, 영정(影幀)을 모시지 못하여 고심(苦心)하였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이 영정(影幀)은 본래(本來) 고자암(高自庵)에서 모셔 왔다. 고자암(高自庵)은 왕(王)께서 왕위(王位)에서 물러나신 뒤 산천(山川)을 유람하시던 중, 제천(堤川)에 이궁(離宮)을 지으시고 원주(原州) 용화산(龍華山)에 지으신 암자(庵子)이다. 신하(臣下)들이 왕(王)의 덕(德)을 기리어 그렸던지 아니면 스님들이 왕(王)께서 백성(百姓)을 위하여 나라를 양보(讓步)하신 어지심을 기리어 그렸을 것이다.

 

고려중엽(高麗中葉)부터 절이 퇴락(頹落)하였는데 황산거사(黃山居士)가 영정(影幀)을 발견(發見)하여 영정각(影幀閣)을 세웠었다.

조선 초(朝鮮初)에 이색(李穡) 권희(權僖) 권근(權近) 등이 영정각(影幀閣)을 보수(補修)하였다. 그 뒤 삼백(三百)년 동안 차츰 얼굴빛(容色)이 낡아져 숙종 정사(肅宗丁巳, 1677년) 때 왕(王)의 후손(後孫)인 김필진(金必振)이 원주목사(原州牧使)로서 다시 영정(影幀)을 그대로 그리고, 대웅전(大雄殿) 옆에 영정각(影幀閣)을 새로 세웠다. 그 뒤 정축년(丁丑年)에 절이 불탔으나 영정각(影幀閣)은 그대로 무사(無事)하였다. 김시양(金時讓)이 이 영정(影幀)이 있음을 일찍이 알고 찾아가 배알(拜謁)하니 인후자애(仁厚慈愛)의 기상(氣像)이 넘치시고 귀가 크고 눈썹이 무성(茂盛)하여 수염이 적고 이마가 넓으시어, 왕자(王者)로서의 위풍(威風)이 계셨다.

왕(王)의 영정(影幀)은 순천 송광사(順天松廣寺)에도 한 본(本)이 있었는데, 일본 사람들이 모셔다 모사(模寫)한 다음 반환(返還)하였다고 한다.

 

 

 

p01.png 12. 경순왕릉(敬順王陵)

경순왕릉(敬順王陵)은 경기도(京畿道) 연천군(漣川郡) 백학면(百鶴面) 고랑포리(高浪浦里)에 있는데 그곳은 현재(現在) 군작전구역(軍作戰區域)이라 일반인(一般人)의 출입(出入)이 금지(禁止)되어 있다. 1976년에 정부(政府)에서 보수(補修)하여 성역화(聖域化)되어 있다.

현존(現存)하는 비(碑)는 1747년에 세웠는데 전면(前面)에는 ‘新羅敬順王之陵’이라 쓰여 있고, 후면(後面)에는 ‘王新羅第五十六代王後唐天成二年戊子代景哀王而立淸泰乙未遜國于高麗宋平興國戊寅麗景宗二年四月四日薨諡敬順以王禮葬于長湍古府南八里癸坐之原至純德英謨毅烈聖上二十三年丁卯月立改立’이라 쓰여 있다.

 

 

 

p01.png 13. 경순왕 송덕비각(敬順王頌德碑閣)

경순왕 팔각비각(敬順王八角碑閣)은 왕(王)의 송덕비(頌德碑)로서 지금부터 140여 년 전에 세운 것이다. 숭혜전 정문(崇惠殿正門)을 향하여 바른쪽 편에 위치(位置)하고 있다. 소재(所在):경북(慶北) 경주시(慶州市) 황남동(皇南洞) 716

 

 

 

p01.png 14. 경천묘(敬天廟)

경순왕(敬順王)께서는 927년 정해(丁亥)에 왕위(王位)에 오르셨다가 935년 을미(乙未)에 나라를 고려태조(高麗太祖)에게 넘겨주시고, 말년(末年)에는 원주(原州)의 용화산(龍華山)에 이궁(離宮)을 세우시고 사시다가 돌아가시니 능(陵)은 경기도(京畿道) 장단군(長湍郡) 고랑진(皐浪津) 성거산(聖居山:지금(只今)의 연천군(漣川郡) 백학면(白鶴面) 고랑포(高浪浦)) 계좌(癸坐)이다.

원주(原州)의 주민(住民)들은 경순왕(敬順王)을 위하여 경천묘(敬天廟)를 세우고, 왕(王)의 진영(眞影)을 모시고 제사(祭祀)를 지냈다.

오랜 세월(歲月)이 흐르는 동안 퇴락(頹落)하고 관리(管理)하는 사람이 없어, 후손(後孫)인 형로종장(亨老宗丈)이 왕(王)의 원당(願堂)인 경남(慶南) 하동군(河東郡) 옥천평(玉泉坪) 쌍계사(雙磎寺) 부근(附近)에 영당(影堂)을 세워 영정(影幀)을 모시려고 하여 우선 재사(齋舍)에 모시고, 예조(禮曹)에 품신(禀申)하여 창건문(創建文)의 재가(裁可)를 받았다. 갑자기 형로종장(亨老宗丈)님이 돌아가시므로 영정(影幀)을 경주의 숭혜전(慶州崇惠殿)에 모셨다가 유림(儒林)과 후손(後孫) 성행종장(聖行宗丈)이 힘을 모아 1903년 계묘(癸卯)에 건립하고, 1904년 갑진(甲辰)에 숭혜전(崇惠殿)에 잠시(暫時) 모시었던 영정(影幀)을 옮겨다 모시었다.

 

 

p01.png 1. 계림(雞林)

김씨(金氏)의 발상지(發祥地). 전설(傳說)에 따르면 신라(新羅) 제4대 석탈해왕(昔脫解王) 9년(서기 65년) 3월 어느 날 시림(始林) 숲속에서 밤중에 닭의 울음소리를 듣고 날이 밝자 호공(瓠公)을 보내어 살피게 하였더니, 금 빛깔의 조그마한 궤짝이 나뭇가지에 걸려있는데 흰 닭 한 마리가 그 밑에서 울고 있었다.

호공(瓠公)이 돌아와 왕(王)에게 이 사실(事實)을 아뢰니 왕(王)이 그 궤짝을 가져오게 하여 궤짝을 열어보니 그 안에는 용모(容貌)가 기이(寄異)하게 뛰어난 사내아이가 들어있었다. 왕(王)은 하늘이 보낸 아이라고 크게 기뻐하고 거두어 기르고, 그 숲을 닭이 울었다고 하여 계림(雞林)으로 고치고, 나라이름도 계림(雞林)으로 고쳤다.

이 아이의 이름을 알지(閼智)라 하였으며, 금궤(金檟)에서 나왔으므로 그 자손(子孫)들을 김씨(金氏)라 불렀다고 한다.

아무튼 이 계림(雞林)은 우리 김씨부족(金氏部族)이 웅거(雄據)하여 왕가(王家)로의 기반(基盤)을 닦은 신성(神聖)한 터이다.

신라(新羅) 사람들이 닭을 신성시(神聖視)하는 것도 계림(雞林) 관계인 것 같다.

‘김씨(金氏)라는 성(姓)은 신성(神聖)하고, 왕(王)이라는 뜻이다’라는 새로운 해석(解釋)이 유력(有力)하여진다.

 

 

 

p01.png 2. 계림(雞林) 비각(碑閣)

계림(雞林) 안에 있는 이 비각(碑閣)은 조선순조계해(朝鮮純祖癸亥:1803년) 11월에 세운 것이다.

참봉(叅奉) 김성걸(金成杰)의 청(請)으로 규장각직제학(奎章閣直提學) 남공철(南公轍)이 비문(碑文)을 쓴 비(碑)를 모셨는데, 이 비(碑)는 계림(雞林)의 내력(來歷)과 신라김씨왕실(新羅金氏王室)의 치적(治蹟)을 적은 다음

‘苑彼雞林 興王之基 孰敢不敬 我銘在碑’

(저 계림(雞林)의 동산 숲 왕업(王業)을 일으킨 터이니 누가 감(敢)히 우러르지 않으리 나 이 비(碑)에 새기노라)고 명(銘)하였다.

이 비각(碑閣)은 문화재(文化財)로서 당국(當局)에서 관리(管理)한다.

 

 

 

p01.png 3. 계림(雞林) 세묘(世廟)

경주(慶州) 숭혜전(崇惠殿) 앞에 있는 시조묘(始祖廟)에는 시조대왕 휘 알지(始祖大王諱閼智)를 모신 곳이다.

 

상향축문(常享祝文)

‘雞林大輔公伏以德被生靈功安社稷繼作名師世傳千億維季春謹以牲幣禮齊粢盛庶品式陳明薦尙饗’

 

 

 

p01.png 4. 숭혜전(崇惠殿)

숭혜전(崇惠殿)은 신라 제13대 미추왕(新羅第十三代味鄒王)과, 제30대 문무왕(第三十代文武王)과 제56대(第五十六代) 경순왕(敬順王)의 위패(位牌)를 모신 곳이다.

미추왕(味鄒王)은 우리 김씨(金氏)로서는 처음으로 왕위(王位)에 오르신 왕(王)이시며, 문무왕(文武王)은 삼국통일(三國統一)을 이룩하신 성주(聖主)이시고, 경순왕(敬順王)은 백성(百姓)을 지극(至極)히 사랑하사 평화통일(平和統一)을 위하여 나라를 고려 태조(高麗太祖)에게 손위(遜位)하신 왕(王)이시다.

1723년에 편액(扁額)이 하사(下賜)되고 전참봉(殿叅奉)을 두기 시작하였다.

원래(元來)에는 경순왕(敬順王)만 모셔왔는데 1887년에 미추왕(味鄒王)과 문무왕(文武王)을 같이 모셨다. 이 해에 경주부윤(慶州府尹) 金철회로 하여금 5간(間)을 더 늘려 짓고 숭혜전(崇惠殿)이라 이름하였다.

주벽은 미추왕(主壁 味鄒王)

동벽은 문무왕(東壁 文武王)

서벽은 경순왕(西壁 敬順王)

춘향제(春享祭)는 춘분일(春分日)

추향제(秋享祭)는 추분일(秋分日)

대제일(大祭日)은 동짓날(冬至日)

매월삭망분향(每月朔望焚香)을 하고 있다.

 

 

 

p01.png 5. 미추왕릉(味鄒王陵)

미추왕(味鄒王)은 262년에 우리 김씨(金氏)로서는 최초(最初)로 왕위(王位)에 오르셨고, 23년간(年間) 재위(在位)하셨다. 백제(百濟)의 침입(侵入)을 5회(回)나 막고 중농정책(重農政策)과 인정(仁政)을 베푸셨다. 이 능(陵)을 죽현릉(竹現陵) 또는 죽릉(竹陵)이라고도 한다.

유례왕(儒禮王) 14년에 이서국(伊西國)의 군사(軍士)들이 침입하여 왔을 때 이를 막지 못하고 있는데 홀연(忽然) 머리에 댓잎(竹葉)을 꽂은 수많은 군사(軍士)가 와서 적(敵)을 막은 다음 사라졌고, 댓잎(竹葉)만이 미추왕릉(味鄒王陵)에 쌓였다고 한다.

이는 미추왕(味鄒王)께서 음병(蔭兵)을 보내시어 적병(敵兵)을 막으셨다 하여 죽현릉(竹現陵)이라 부르게 되었다.

 

 

 

p01.png 6. 내물왕릉(奈勿王陵)

신라 제17대 내물왕(新羅第十七我奈勿王)은 일명(一名) 내밀왕(奈密王)이라고도 하는데 미추왕(味鄒王)의 조카(侄)이시며 또 사위(婿)이시다.

미추왕(味鄒王)의 딸 보반부인(保反夫人)과의 사이에서 눌지왕(訥祗王)을 낳으셨다. 우리 직계조상(直系祖上)으로서는 최초(最初)로 왕위(王位)에 오르셨다.

356년부터 402년까지 왕위(王位)에 계셨으며, 두 차례에 걸친 왜구(倭寇)와 말갈군(靺鞨軍)을 대파(大破)하셨고, 선정(善政)을 베풀어 백제(百濟)에서 귀화(歸化)하는 이가 많았다. 능(陵)은 계림(雞林) 뒤에 모셔있다.

 

 

 

p01.png 7. 천마총(天馬塚)

이곳은 국토통일(國土統一)의 기상(氣像)이 넘치고 민족문화(民族文化)가 찬란(燦爛)하게 꽃핀 신라(新羅)의 천년고도(千年古都) 서라벌(徐羅伐)의 옛 터다. 이 천마총(天馬塚)은 약 1,500년 전의 왕릉(王陵)으로 추정(推定)하고 있다.

불교(佛敎)가 전래(傳來)될 당시(當時) 다른 왕(王)들의 누운 위치(位置)의 상체(上體)가 북쪽으로 향(向)하였던 것이 이 왕(王)의 상체(上體)는 동쪽을 향(向)하고 있는 점(點)이 특색(特色)이다. 특(特)히 왕관(王冠), 혁대(革帶) 등 장신구(裝身具)들이 유별(類別)나게 큰 것으로 보아 팔척장신(八尺長身)이셨던 지증왕릉(智證王陵)으로 추정(推定)하고 있다. 이 능(陵)의 윗부분(部分)에서 말의 안장과 하늘을 날을 듯한 천마(天馬)의 그림이 나왔다고 하여 천마총(天馬塚)이라 한다.

 

 

 

p01.png 8. 원성왕릉(元聖王陵,괘릉(掛陵)

신라(新羅) 제38대왕으로서 휘는 경신(諱敬信), 내물왕(奈勿王)의 12세손(世孫), 혜공왕 말년(惠恭王末年)에 반란(叛亂)을 평정(平定)하신 공(功)이 있어, 상대등(上大等)이 되었다가 선덕왕(宣德王)의 뒤를 이어 785년에 즉위(卽位)하자 고조(高祖) 이하(以下)를 왕(王)에 추봉(追封)하시고, 788년에는 독서출신과(讀書出身科)를 두어 인재(人材)를 선발(選拔)하셨고, 790년에는 벽골제(碧骨堤)를 증축(增築)하여 농사(農事)를 장려(獎勵)하시는 등(等) 798년까지 왕위(王位)에 계셨으니, 문치(文治)로서 선정(善政)을 베푸신 명군(名君)이시다.

지증왕이후(智證王以後) 271년 만에 비로소 우리 직계선조(直系先祖)께서 왕위(王位)에 오르셨으며, 이후(以後) 경순왕(敬順王)까지는 원성왕(元聖王)의 혈손(血孫)이 935년까지 계속(繼續) 왕위(王位)를 이었으므로 경순왕계김씨(敬順王系金氏)로서는 중시조(中始祖)에 해당(該當)하신다. 능(陵)은 경북(慶北) 월성군(月城郡) 외서면(外西面) 괘릉리(掛陵里)에 있다.

 

 

 

p01.png 9. 신무왕릉(神武王陵)

신라(新羅) 제45대왕 휘는 우징(諱佑徵)이시니 원성왕(元聖王)의 증손(曾孫)이시다.

우리 직계선조(直系先祖)로서 혁명(革命)을 일으켜 숙적(宿敵)인 민애왕(閔哀王)을 시(弑)하고 839년에 즉위(卽位)하셨다. 그러나 1년을 못 채우시고 병환(病患)으로 돌아가셨다. 능(陵)은 경주(慶州) 제형산(弟兄山)에 있다.

 

 

 

p01.png 10. 문성왕릉(文聖王陵)

신라(新羅) 제46대왕 휘는 경응(諱慶應)으로 신무왕(神武王)의 태자(太子)요, 어머님은 정계부인(貞繼夫人)이시다.

비(妃)는 위혼(魏昕)의 딸 우리 직계선조(直系先祖)로서 839년에 왕위(王位)에 오르시어 857년까지 계시는 동안 841년 재위(在位) 3년에 홍필(弘弼)의 반란(反亂) 청해진(靑海鎭)을 근거(根據)로 반란(反亂)을 일으켰으나, 진압(鎭壓)된 사건(事件), 847년에는 양순(良順) 등의 모반(謀叛) 849년에 김식(金式) 등이 모반(謀叛)하는 등 어지러운 시대(時代)였다. 그러나 산동반도(山東半島)에 근거(根據)를 두고 신라(新羅)ㆍ일본(日本)ㆍ당(唐) 세 나라를 상대(相對)로 무역활동(貿易活動)을 하던 궁복(弓福) 장보고(張保皐) 등이 모반(謀叛)하기 전에는 고국(故國)에 돌아와 청해진대사(靑海鎭大使)로부터 청해위군(靑海尉軍)이 되어 해상교통(海上交通)의 통제(統制)를 담당(擔當)하여 당(唐)나라와의 개선(改善)과 사절(使節)의 내왕(來往)이 빈번(頻繁)했다고 한다.

경순왕(敬順王)은 문성왕(文聖王)의 현손(玄孫)이시다.

 

 

 

p01.png 11. 경순왕(敬順王) 영정(影幀)

신라 경순왕(新羅敬順王)은 제56대왕(代王)으로 휘는 부(諱傅)이시다. 897년에 나시어 927년부터 935년까지 왕위(王位)에 계셨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따르면 김씨시조(金氏始祖)인 추존시조대왕 휘 알지(追尊始祖大王諱閼智)의 28세손(世孫)이라 한다.

경애왕(景哀王)의 이종동생(姨從同生)이시고 헌강왕(憲康王)의 외손자(外孫子)로서 경애왕 박씨(景哀王朴氏)의 뒤를 이어 왕위(王位)에 오르셨다. 신라말기(新羅末期)의 국력(國力)은 쇠약(衰弱)하여 도적이 사방(四方)에서 일어나, 궁예(弓裔)와 견훤(甄萱)이 각각(各各) 북쪽과 서쪽에서 나라를 세우고, 서로 신라(新羅)를 침범(侵犯)하여 백성(百姓)은 도탄(塗炭)에 빠졌었다.

 

경애왕(景哀王)이 포석정(飽石亭)에서 놀이하고 있을 때 궁중(宮中)에 쳐들어간 견훤(甄萱)은 경애왕(景哀王)을 죽이고, 경순왕(敬順王)을 왕위(王位)에 오르시게 하였다. 천성(天性)이 어지신 왕(王)께서는 재위(在位) 9년 만에 ‘무고(無辜)한 백성(百姓)으로 하여금 간뇌(間腦)로 땅을 물들이게 함은 나로서는 참을 수 없다’ 하시고 어진 고려왕건태조(高麗王建太祖)에게 나라를 양여(讓與)하시었다. 고려태조왕건(高麗太祖王建)의 맏따님 낙랑공주(樂浪公主)와 재혼(再婚)하시고, 정승상부(政丞尙父)의 칭호(稱號)를 받으시더니 고려경종(高麗景宗) 3년(978) 4월에 돌아가셨다.

 

이 영정(影幀)은 경주(慶州) 숭혜전(崇惠殿)에 모신 영정(影幀)이다. 우의정(右議政) 김사목(金思穆)이 쓴 영정기(影幀記)가 있다.

그 기록(記錄)에 따르면 경순왕영정(敬順王影幀)은 계림(雞林)에 모셔 있었는데, 정유재란(丁酉再乱)때 불에 타버렸다고 한다.

그 뒤 인조(仁祖)때 왕이 후손인 김시양(金時讓)이 경상감사(慶尙監司)로서 영정각(影幀閣) 옛터에 다시 숭혜전(崇惠殿)을 세웠는데, 영정(影幀)을 모시지 못하여 고심(苦心)하였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이 영정(影幀)은 본래(本來) 고자암(高自庵)에서 모셔 왔다. 고자암(高自庵)은 왕(王)께서 왕위(王位)에서 물러나신 뒤 산천(山川)을 유람하시던 중, 제천(堤川)에 이궁(離宮)을 지으시고 원주(原州) 용화산(龍華山)에 지으신 암자(庵子)이다. 신하(臣下)들이 왕(王)의 덕(德)을 기리어 그렸던지 아니면 스님들이 왕(王)께서 백성(百姓)을 위하여 나라를 양보(讓步)하신 어지심을 기리어 그렸을 것이다.

 

고려중엽(高麗中葉)부터 절이 퇴락(頹落)하였는데 황산거사(黃山居士)가 영정(影幀)을 발견(發見)하여 영정각(影幀閣)을 세웠었다.

조선 초(朝鮮初)에 이색(李穡) 권희(權僖) 권근(權近) 등이 영정각(影幀閣)을 보수(補修)하였다. 그 뒤 삼백(三百)년 동안 차츰 얼굴빛(容色)이 낡아져 숙종 정사(肅宗丁巳, 1677년) 때 왕(王)의 후손(後孫)인 김필진(金必振)이 원주목사(原州牧使)로서 다시 영정(影幀)을 그대로 그리고, 대웅전(大雄殿) 옆에 영정각(影幀閣)을 새로 세웠다. 그 뒤 정축년(丁丑年)에 절이 불탔으나 영정각(影幀閣)은 그대로 무사(無事)하였다. 김시양(金時讓)이 이 영정(影幀)이 있음을 일찍이 알고 찾아가 배알(拜謁)하니 인후자애(仁厚慈愛)의 기상(氣像)이 넘치시고 귀가 크고 눈썹이 무성(茂盛)하여 수염이 적고 이마가 넓으시어, 왕자(王者)로서의 위풍(威風)이 계셨다.

왕(王)의 영정(影幀)은 순천 송광사(順天松廣寺)에도 한 본(本)이 있었는데, 일본 사람들이 모셔다 모사(模寫)한 다음 반환(返還)하였다고 한다.

 

 

 

p01.png 12. 경순왕릉(敬順王陵)

경순왕릉(敬順王陵)은 경기도(京畿道) 연천군(漣川郡) 백학면(百鶴面) 고랑포리(高浪浦里)에 있는데 그곳은 현재(現在) 군작전구역(軍作戰區域)이라 일반인(一般人)의 출입(出入)이 금지(禁止)되어 있다. 1976년에 정부(政府)에서 보수(補修)하여 성역화(聖域化)되어 있다.

현존(現存)하는 비(碑)는 1747년에 세웠는데 전면(前面)에는 ‘新羅敬順王之陵’이라 쓰여 있고, 후면(後面)에는 ‘王新羅第五十六代王後唐天成二年戊子代景哀王而立淸泰乙未遜國于高麗宋平興國戊寅麗景宗二年四月四日薨諡敬順以王禮葬于長湍古府南八里癸坐之原至純德英謨毅烈聖上二十三年丁卯月立改立’이라 쓰여 있다.

 

 

 

p01.png 13. 경순왕 송덕비각(敬順王頌德碑閣)

경순왕 팔각비각(敬順王八角碑閣)은 왕(王)의 송덕비(頌德碑)로서 지금부터 140여 년 전에 세운 것이다. 숭혜전 정문(崇惠殿正門)을 향하여 바른쪽 편에 위치(位置)하고 있다. 소재(所在):경북(慶北) 경주시(慶州市) 황남동(皇南洞) 716

 

 

 

p01.png 14. 경천묘(敬天廟)

경순왕(敬順王)께서는 927년 정해(丁亥)에 왕위(王位)에 오르셨다가 935년 을미(乙未)에 나라를 고려태조(高麗太祖)에게 넘겨주시고, 말년(末年)에는 원주(原州)의 용화산(龍華山)에 이궁(離宮)을 세우시고 사시다가 돌아가시니 능(陵)은 경기도(京畿道) 장단군(長湍郡) 고랑진(皐浪津) 성거산(聖居山:지금(只今)의 연천군(漣川郡) 백학면(白鶴面) 고랑포(高浪浦)) 계좌(癸坐)이다.

원주(原州)의 주민(住民)들은 경순왕(敬順王)을 위하여 경천묘(敬天廟)를 세우고, 왕(王)의 진영(眞影)을 모시고 제사(祭祀)를 지냈다.

오랜 세월(歲月)이 흐르는 동안 퇴락(頹落)하고 관리(管理)하는 사람이 없어, 후손(後孫)인 형로종장(亨老宗丈)이 왕(王)의 원당(願堂)인 경남(慶南) 하동군(河東郡) 옥천평(玉泉坪) 쌍계사(雙磎寺) 부근(附近)에 영당(影堂)을 세워 영정(影幀)을 모시려고 하여 우선 재사(齋舍)에 모시고, 예조(禮曹)에 품신(禀申)하여 창건문(創建文)의 재가(裁可)를 받았다. 갑자기 형로종장(亨老宗丈)님이 돌아가시므로 영정(影幀)을 경주의 숭혜전(慶州崇惠殿)에 모셨다가 유림(儒林)과 후손(後孫) 성행종장(聖行宗丈)이 힘을 모아 1903년 계묘(癸卯)에 건립하고, 1904년 갑진(甲辰)에 숭혜전(崇惠殿)에 잠시(暫時) 모시었던 영정(影幀)을 옮겨다 모시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