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양(밀성)군은 본래 신라(新羅)의 추화군이었는데 경덕왕이 밀성군이라 개칭하였다.
고려 초까지는 이 명칭을 그대로 사용하다가 성종(成宗) 14년(995년)에 밀주경사라 하고 현종 9년에는 다시 지밀성사라 칭하였다.
원종(元宗) 12년(1271년)에 군인, 방예, 계년, 박경순, 도기, 조선 등이 전남 진도의 삼별초와 호응하여 반란을 일으키고 군수를 살해한 사건이 있었으므로, 충렬왕 원년(1275)에는 밀성군을 격하하여 부곡으로 격하할 것을 진청하였으나, 당무자들이 매양 이를 저지당해 실현을 보지 못하였는데 충렬왕 원년에 이르러 대성의 극론으로 겨우 실현을 보게 되었다. 그 후 군에서 현으로 격하되더니, 공민왕 2년(1390)에 이르러 증조 익양후의
비 박씨의 고향이었으므로 밀양부로 승격되었다.
한편 밀양군 수산면은 고려시대에는 밀성군 관내의 수산현이었으나 그리고 유명한 수산재는 김방경(金方慶) 장군의 소축이란 설이 있는데, 그가 이 제방을 쌓은 목적은 수리를 이용하여 전답에 관개를 하고 일본(日本) 정벌의 군저에 대비키 위한 것이었다고 한다.
-고려사에서-
밀양(밀성)군은 본래 신라(新羅)의 추화군이었는데 경덕왕이 밀성군이라 개칭하였다.
고려 초까지는 이 명칭을 그대로 사용하다가 성종(成宗) 14년(995년)에 밀주경사라 하고 현종 9년에는 다시 지밀성사라 칭하였다.
원종(元宗) 12년(1271년)에 군인, 방예, 계년, 박경순, 도기, 조선 등이 전남 진도의 삼별초와 호응하여 반란을 일으키고 군수를 살해한 사건이 있었으므로, 충렬왕 원년(1275)에는 밀성군을 격하하여 부곡으로 격하할 것을 진청하였으나, 당무자들이 매양 이를 저지당해 실현을 보지 못하였는데 충렬왕 원년에 이르러 대성의 극론으로 겨우 실현을 보게 되었다. 그 후 군에서 현으로 격하되더니, 공민왕 2년(1390)에 이르러 증조 익양후의
비 박씨의 고향이었으므로 밀양부로 승격되었다.
한편 밀양군 수산면은 고려시대에는 밀성군 관내의 수산현이었으나 그리고 유명한 수산재는 김방경(金方慶) 장군의 소축이란 설이 있는데, 그가 이 제방을 쌓은 목적은 수리를 이용하여 전답에 관개를 하고 일본(日本) 정벌의 군저에 대비키 위한 것이었다고 한다.
-고려사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