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도 밀양시(密陽市)에서 세거(世居)하였고, 후손(後孫) 일부(一部)는 금릉시(金陵市) 이거(移居), 또 후손(後孫)은 경기도(京畿道) 전라도(全羅道) 충청도(忠淸道)로 이거(移居), 또한 후손(後孫)은 평안도(平安道) 함경도(咸鏡道) 황해도(黃海道) 기타(其他) 지역으로 분산 세거(世居)하고 있습니다. 외 침입(外侵入)과 국란(國亂)의 세파(世波) 속에 각 지역(各地域)으로 이거(移居) 분산(分散)되니 슬프기 한(限)이 없고 지금(至今)도
국토(國土)가 양단되고 있으니, 가슴을 치고 통곡하나 혈육(血肉)의 정(情)과 조상님(祖上任)을 사모(思慕)할 날을 기대하면서 희망(希望)을 가지고 숭조사상정신(崇祖思想精神)을 가지면서
1. 경양파(京陽派) 시조 5세손 봉상공(始祖五世孫奉常公)
경기도(京畿道) 고양시(高陽市) 신원동(新院洞) 송강(松江) 마을에서 고려조 때부터 세거(世居)하였다. 상세(詳細)히 상고(上古)할 수 없으나 대종손(大宗孫) 김상복공(金上福公)과 후손의 말과 종손(宗孫) 순택(順澤)의 말을 인용(引用)하면 국내외란(國內外亂)으로 후손(後孫)들이 경기도(京畿道) 일원(一圓)으로 산재(散在)하여 세거(世居)하고 있다. 또한 족보(族譜)와 교지 및 유품교육 등(遺品敎育等) 고문서(古文書)가
잘 보존(保存)하고
있었으나 6ㆍ25사변당시(事變當時) 분실 소실(燒失)되었다고 하면서 애석(哀惜)해 하고 있다.
선산(先山) 묘역내(墓域內)에 역대조(歷代祖) 묘(墓)의 상석 등(床石等)으로 확인(確認)한 바 약(約) 700년 정도(程度)로 추정(推定:전문가 감정)되고 묘(墓)의 6기(基) 및 15기(基)가 2개소(個所)의 묘역(墓域)에 잘 보전(保全)되어서 종가 주최하(宗家主催下)에 전 자손(全子孫)이 매년(每年) 8월 초에 성역(聖域) 벌초를 하고 관리보존(管理保存)하고 조상(祖上)님의 은덕(恩德)을 추모(追慕)하고 있으나 우리
산(先山:종중재산(宗中財産))을
연산군(燕山君) 1498년 때 연산군의 백부(伯父) 월산대군(月山大君)의 장지(葬地)로 사용(使用)하기 위(爲)하여 선산전역(先山全域)을 강점당(強占當)한 까닭(현(現) 전주이씨(全州李氏) 소유(所有))에 우리 후손(後孫)들은 강제(強制)로 추방(追放) 당(當)하여 파주(坡州), 포천(抱川), 의정부(議政府), 양주(楊州), 가평(加平), 광주(廣州), 옹진(甕津) 등(等) 충청도(忠淸道)와 일부(一部) 기타(其他) 지역(地域)으로 산재(散在)되어서, 살게 된 운명(運命)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그때 그 시절(時節)부터 고충(苦衷)을 참고, 견디어온 종손(宗孫)을 비롯한 후손(後孫)들은 남아 대대(代代)로 승계(承繼)하여 선산(先山)을 지켜왔기에 오늘에 이르기까지 숭조정신(崇祖精神)을 지켜왔다고 하겠다.
2. 평안도파(平安道派:평안도 개천) 함경파(咸鏡派) 시조 6세손(世孫) 광석공(廣碩公)
① 평안도 개천(平安道价川)과 순천(順川:순천군(順川郡) 내남면(內南面) 금곡리(金谷里)) 일원(一圓)이 조선조초기(朝鮮朝初期)부터 세거(世居, 경주(慶州)에서 이거(移居))하신 평안도(平安道), 함경도(咸鏡道) 중조(中祖) 김광석공(金廣碩公)은 태종(太宗) 12년 임진(壬辰) 1412년생 세종조(世宗朝) 12년(1447년) 피명(被命) 밀양부사(密陽府使) 통정대부(通政大夫) 역임(歷任) 고향(故鄕)인
경주(慶州)로
이거(移居)하시었다. 자(子) 산보공(山寶公)은 어모장군(禦侮將軍) 손 한복공(孫漢福公)은 통정대부(通政大夫) 평안도(平安道) 원개천(元价川)에서 안착(安着)하시고 그 후손(後孫)들은 광복당시(光復當時) 월남(越南)하시고 또 6ㆍ25사변(事變)과 1ㆍ4후퇴시(後退時) 월남(越南)한 종친(宗親)이 약(約) 170호(戶)가 서울과 인천시(仁川市), 청주시(淸州市), 경상도(慶尙道), 강원도(江原道), 경기도(京畿道) 일원 등(一圓等) 그 외 지방(其外地方)에서 세거(世居)하고 있다.
② 황해도 연평(黃海道延坪), 연안(延安) 서흥 등(瑞興等) 지방(地方)에서 세거(世居)한 종친(宗親) 일부(一部)는 6ㆍ25사변(事變)과 1ㆍ4후퇴(後退) 당시(當時) 월남(越南)하여 연안파(延安派) 약(約) 60호(戶) 서흥파(瑞興派) 약(約) 20호(戶) 그 외(其外) 후손(後孫)은 경기도(京畿道), 인천(仁川), 청주(淸州), 목포(木浦)에서 세거(世居)하고 있다.
③ 함경도(咸鏡道) 안농면(安農面) 금희리(金熙里) 종족(宗族)은 1930년도 인구조사당시(人口調査當時) 약(約) 117호(戶)에 이르렀으나 6ㆍ25사변(事變)과 1ㆍ4후퇴(後退)로 월남(越南)한 종친(宗親)은 8호(戶)에 달(達)하고 있다.
3. 전남 영암파(全南靈巖派:전남 영암 청룡리) 시조(始祖) 8세손(世孫) 김윤신공(金潤身公)
전남도(全南道) 영암군(靈岩郡) 서호면(西湖面) 청룡리(靑龍里) 영암입향조(靈巖入鄕祖) 김윤신공(金潤身公)은 성균관생원(成均館生員), 성균관진사(成均館進士) 전적(典籍:정6품(正六品))이시다. 외침(外侵)과 국란(國亂)이 빈번(頻煩)이 일어나자 7세시(7歲時) 외조부(外祖父) 김해김씨(金海金氏)를 따라 경산도 금릉군(金陵郡)에서 최고 남단(南端)인 영암군(靈岩郡) 용두리(龍頭里)로 이거(移居), 그(其) 후손
4대손(後孫四代孫)
김홍발공(金弘發公)과 김경발공(金景發公)은 숙부(叔父)님과 7형제(七兄弟)는 협의(協議)한 후(後) 결정(決定)하고 인조조(仁祖朝) 무진(戊辰) 1628년 3월 2일 청룡리(靑龍里) 일부(一部)인 옥룡암사(玉龍菴寺:즉 도선사(道詵寺)) 전 재산(全財產)을 주지승인(住持僧人) 박승학(朴勝學)으로부터 매입(買入:무명배 27통)하여 세거(世居)하면서 숭조사상정신(崇祖思想精神)에 입각(入脚)한 노동사당(盧洞祠堂)을 창건(創建:정조(正祖) 7년 계묘(癸卯) 1783년 3월 18일)하고 매년(每年) 음(陰)10월 초(初) 정일(丁日)에 대제(大祭)를 모시고 있고, 또한 송정사당(松亭祠堂)은
신해년(辛亥年:1971년)에 건립(建立)하여 매년(每年) 음(陰)3월 20일 대제(大祭)를 모시고 있다. 또한 일부(一部) 후손(後孫) 11세손(世孫) 김철공(金鐵公)의 후손(後孫)이 전라북도(全羅北道) 김제군(金堤郡) 임실군(任實郡) 전주시(全州市)(현(現) 봉남면 평사리) 또 해남군(海南郡) 화원면(花源面) 장세동에서 세거(世居)하고 있다.
영암에 이거(移居)한 그(其) 후손(後孫)은 고향(故鄕)에서 조상(祖上)을 받들고 있고 또한 서울, 전주(全州), 해남(海南), 무안군(務安郡) 등(等) 그 외(其外) 지방(地方)에 세거(世居)하고 있다.
4. 충청도 서산파(忠淸道瑞山派) 시조(始祖) 10세손(世孫) 김홍준공(金弘濬公)
충청도(忠淸道) 서산군(瑞山郡) 지곡면(地谷面) 환성리(環城里)에서 세거(世居)하신 중조(中祖) 의양공(毅襄公) 김홍준(金弘濬) 조선조(朝鮮朝) 병조판서 등(兵曹判書等)을 지내시고 만년(晚年)에 한성(漢城)에서 서산(瑞山) 무역골로 낙향(落鄕)하시고, 그 후손(其後孫)이 세거(世居)하면서 조상(祖上)을 받들고 일부 후손(一部後孫)은 서울, 당진, 경기도(京畿道), 인천(仁川) 등 각 지방(各地方)에서 거주(居住)하고
있다.
5. 광주파(廣州派) 시조(始祖) 9세손(世孫) 김구공(金龜公)
공(公)은 한양(漢陽)에서 경기도(京畿道) 광주군(廣州郡) 구마면(究馬面) 갈현리(渴峴里)(현(現) 성남시(城南市))로 이거(移居)하시고 행용장군(중종(中宗) 27년 1532년생)을 지내고 4세손(世孫) 김정하공(金鼎夏公) 절충장군(광해 1년 1609년생) 정묘(丁卯)와 병자호란(丙子胡亂) 당시(當時) 남한산성(南漢山城)을 수위장군으로서 임하는 중(中)에 중국(中國) 청군(淸軍)에게 화를 당(當)하였다. 그 후(其後)에 인조왕(仁祖王)으로부터
교지(敎旨)를 내리신바 후손(後孫)은 지금(至今)도 광주(廣州), 성남(城南), 서울, 인천 등지(仁川等地)에서 세거(世居)하면서 선산(先山) 남한산성하(南漢山城下) 금봉동에서 매년(每年) 음(陰) 10월 15일 대제(大祭)를 받들고 있다. 종손(宗孫) 김종화(金鍾和)가 교지(敎旨) 20매(枚)를 보관(保管)하고 있다.
6. 강원도(江原道) 철원군(鐵原郡) 금화(金化)와 원남면(遠南面) 노동(盧洞)마을 일대(一帶)에서 세거(世居)하고 있다.
6ㆍ25사변(事變)과 1ㆍ4후퇴(後退) 당시(當時)에 월남(越南)한 김영순(金榮淳), 영선(永善), 운선(雲善), 봉화 등(奉化等) 종친(宗親)의 말에 의(衣)하면 선대(先代)에서 원래(元來) 평안도(平安道) 강계군(江界郡) 성천면 오포리에서 세거(世居)한 사실(事實)이 있고, 강원도(江原道) 금화군(金化郡) 원남면(遠南面)에서 약(約) 100호(戶)가 세거(世居)하면서 족보(族譜)도 보존(保存)하고 있으며 또한 조부(祖父)와
부친(父親)께서 경기도(京畿道)
고양(高陽)으로 시제(時祭)를 모시러 가시고 또한 고양군(高陽郡)의 종친(宗親) 어르신들이 원남면(遠南面)에 오시는 등(等) 시제(時祭)에 참례(參禮)하시면서 숭조정신(崇祖精神)의 앙양(昂揚)에 지극(至極)하시었다는 것을 그 당시(當時)를 기억(記憶)하신 김영선(金永善)과 봉화종친(奉化宗親)은 그 당시(其當時)에 20대(代) 청년(靑年)이었다고 한다. 지금(只今)은 67세(歲)이다.
경상도 밀양시(密陽市)에서 세거(世居)하였고, 후손(後孫) 일부(一部)는 금릉시(金陵市) 이거(移居), 또 후손(後孫)은 경기도(京畿道) 전라도(全羅道) 충청도(忠淸道)로 이거(移居), 또한 후손(後孫)은 평안도(平安道) 함경도(咸鏡道) 황해도(黃海道) 기타(其他) 지역으로 분산 세거(世居)하고 있습니다. 외 침입(外侵入)과 국란(國亂)의 세파(世波) 속에 각 지역(各地域)으로 이거(移居) 분산(分散)되니 슬프기 한(限)이 없고 지금(至今)도
국토(國土)가 양단되고 있으니, 가슴을 치고 통곡하나 혈육(血肉)의 정(情)과 조상님(祖上任)을 사모(思慕)할 날을 기대하면서 희망(希望)을 가지고 숭조사상정신(崇祖思想精神)을 가지면서
1. 경양파(京陽派) 시조 5세손 봉상공(始祖五世孫奉常公)
경기도(京畿道) 고양시(高陽市) 신원동(新院洞) 송강(松江) 마을에서 고려조 때부터 세거(世居)하였다. 상세(詳細)히 상고(上古)할 수 없으나 대종손(大宗孫) 김상복공(金上福公)과 후손의 말과 종손(宗孫) 순택(順澤)의 말을 인용(引用)하면 국내외란(國內外亂)으로 후손(後孫)들이 경기도(京畿道) 일원(一圓)으로 산재(散在)하여 세거(世居)하고 있다. 또한 족보(族譜)와 교지 및 유품교육 등(遺品敎育等) 고문서(古文書)가
잘 보존(保存)하고
있었으나 6ㆍ25사변당시(事變當時) 분실 소실(燒失)되었다고 하면서 애석(哀惜)해 하고 있다.
선산(先山) 묘역내(墓域內)에 역대조(歷代祖) 묘(墓)의 상석 등(床石等)으로 확인(確認)한 바 약(約) 700년 정도(程度)로 추정(推定:전문가 감정)되고 묘(墓)의 6기(基) 및 15기(基)가 2개소(個所)의 묘역(墓域)에 잘 보전(保全)되어서 종가 주최하(宗家主催下)에 전 자손(全子孫)이 매년(每年) 8월 초에 성역(聖域) 벌초를 하고 관리보존(管理保存)하고 조상(祖上)님의 은덕(恩德)을 추모(追慕)하고 있으나 우리
산(先山:종중재산(宗中財産))을
연산군(燕山君) 1498년 때 연산군의 백부(伯父) 월산대군(月山大君)의 장지(葬地)로 사용(使用)하기 위(爲)하여 선산전역(先山全域)을 강점당(強占當)한 까닭(현(現) 전주이씨(全州李氏) 소유(所有))에 우리 후손(後孫)들은 강제(強制)로 추방(追放) 당(當)하여 파주(坡州), 포천(抱川), 의정부(議政府), 양주(楊州), 가평(加平), 광주(廣州), 옹진(甕津) 등(等) 충청도(忠淸道)와 일부(一部) 기타(其他) 지역(地域)으로 산재(散在)되어서, 살게 된 운명(運命)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그때 그 시절(時節)부터 고충(苦衷)을 참고, 견디어온 종손(宗孫)을 비롯한 후손(後孫)들은 남아 대대(代代)로 승계(承繼)하여 선산(先山)을 지켜왔기에 오늘에 이르기까지 숭조정신(崇祖精神)을 지켜왔다고 하겠다.
2. 평안도파(平安道派:평안도 개천) 함경파(咸鏡派) 시조 6세손(世孫) 광석공(廣碩公)
① 평안도 개천(平安道价川)과 순천(順川:순천군(順川郡) 내남면(內南面) 금곡리(金谷里)) 일원(一圓)이 조선조초기(朝鮮朝初期)부터 세거(世居, 경주(慶州)에서 이거(移居))하신 평안도(平安道), 함경도(咸鏡道) 중조(中祖) 김광석공(金廣碩公)은 태종(太宗) 12년 임진(壬辰) 1412년생 세종조(世宗朝) 12년(1447년) 피명(被命) 밀양부사(密陽府使) 통정대부(通政大夫) 역임(歷任) 고향(故鄕)인
경주(慶州)로
이거(移居)하시었다. 자(子) 산보공(山寶公)은 어모장군(禦侮將軍) 손 한복공(孫漢福公)은 통정대부(通政大夫) 평안도(平安道) 원개천(元价川)에서 안착(安着)하시고 그 후손(後孫)들은 광복당시(光復當時) 월남(越南)하시고 또 6ㆍ25사변(事變)과 1ㆍ4후퇴시(後退時) 월남(越南)한 종친(宗親)이 약(約) 170호(戶)가 서울과 인천시(仁川市), 청주시(淸州市), 경상도(慶尙道), 강원도(江原道), 경기도(京畿道) 일원 등(一圓等) 그 외 지방(其外地方)에서 세거(世居)하고 있다.
② 황해도 연평(黃海道延坪), 연안(延安) 서흥 등(瑞興等) 지방(地方)에서 세거(世居)한 종친(宗親) 일부(一部)는 6ㆍ25사변(事變)과 1ㆍ4후퇴(後退) 당시(當時) 월남(越南)하여 연안파(延安派) 약(約) 60호(戶) 서흥파(瑞興派) 약(約) 20호(戶) 그 외(其外) 후손(後孫)은 경기도(京畿道), 인천(仁川), 청주(淸州), 목포(木浦)에서 세거(世居)하고 있다.
③ 함경도(咸鏡道) 안농면(安農面) 금희리(金熙里) 종족(宗族)은 1930년도 인구조사당시(人口調査當時) 약(約) 117호(戶)에 이르렀으나 6ㆍ25사변(事變)과 1ㆍ4후퇴(後退)로 월남(越南)한 종친(宗親)은 8호(戶)에 달(達)하고 있다.
3. 전남 영암파(全南靈巖派:전남 영암 청룡리) 시조(始祖) 8세손(世孫) 김윤신공(金潤身公)
전남도(全南道) 영암군(靈岩郡) 서호면(西湖面) 청룡리(靑龍里) 영암입향조(靈巖入鄕祖) 김윤신공(金潤身公)은 성균관생원(成均館生員), 성균관진사(成均館進士) 전적(典籍:정6품(正六品))이시다. 외침(外侵)과 국란(國亂)이 빈번(頻煩)이 일어나자 7세시(7歲時) 외조부(外祖父) 김해김씨(金海金氏)를 따라 경산도 금릉군(金陵郡)에서 최고 남단(南端)인 영암군(靈岩郡) 용두리(龍頭里)로 이거(移居), 그(其) 후손
4대손(後孫四代孫)
김홍발공(金弘發公)과 김경발공(金景發公)은 숙부(叔父)님과 7형제(七兄弟)는 협의(協議)한 후(後) 결정(決定)하고 인조조(仁祖朝) 무진(戊辰) 1628년 3월 2일 청룡리(靑龍里) 일부(一部)인 옥룡암사(玉龍菴寺:즉 도선사(道詵寺)) 전 재산(全財產)을 주지승인(住持僧人) 박승학(朴勝學)으로부터 매입(買入:무명배 27통)하여 세거(世居)하면서 숭조사상정신(崇祖思想精神)에 입각(入脚)한 노동사당(盧洞祠堂)을 창건(創建:정조(正祖) 7년 계묘(癸卯) 1783년 3월 18일)하고 매년(每年) 음(陰)10월 초(初) 정일(丁日)에 대제(大祭)를 모시고 있고, 또한 송정사당(松亭祠堂)은
신해년(辛亥年:1971년)에 건립(建立)하여 매년(每年) 음(陰)3월 20일 대제(大祭)를 모시고 있다. 또한 일부(一部) 후손(後孫) 11세손(世孫) 김철공(金鐵公)의 후손(後孫)이 전라북도(全羅北道) 김제군(金堤郡) 임실군(任實郡) 전주시(全州市)(현(現) 봉남면 평사리) 또 해남군(海南郡) 화원면(花源面) 장세동에서 세거(世居)하고 있다.
영암에 이거(移居)한 그(其) 후손(後孫)은 고향(故鄕)에서 조상(祖上)을 받들고 있고 또한 서울, 전주(全州), 해남(海南), 무안군(務安郡) 등(等) 그 외(其外) 지방(地方)에 세거(世居)하고 있다.
4. 충청도 서산파(忠淸道瑞山派) 시조(始祖) 10세손(世孫) 김홍준공(金弘濬公)
충청도(忠淸道) 서산군(瑞山郡) 지곡면(地谷面) 환성리(環城里)에서 세거(世居)하신 중조(中祖) 의양공(毅襄公) 김홍준(金弘濬) 조선조(朝鮮朝) 병조판서 등(兵曹判書等)을 지내시고 만년(晚年)에 한성(漢城)에서 서산(瑞山) 무역골로 낙향(落鄕)하시고, 그 후손(其後孫)이 세거(世居)하면서 조상(祖上)을 받들고 일부 후손(一部後孫)은 서울, 당진, 경기도(京畿道), 인천(仁川) 등 각 지방(各地方)에서 거주(居住)하고
있다.
5. 광주파(廣州派) 시조(始祖) 9세손(世孫) 김구공(金龜公)
공(公)은 한양(漢陽)에서 경기도(京畿道) 광주군(廣州郡) 구마면(究馬面) 갈현리(渴峴里)(현(現) 성남시(城南市))로 이거(移居)하시고 행용장군(중종(中宗) 27년 1532년생)을 지내고 4세손(世孫) 김정하공(金鼎夏公) 절충장군(광해 1년 1609년생) 정묘(丁卯)와 병자호란(丙子胡亂) 당시(當時) 남한산성(南漢山城)을 수위장군으로서 임하는 중(中)에 중국(中國) 청군(淸軍)에게 화를 당(當)하였다. 그 후(其後)에 인조왕(仁祖王)으로부터
교지(敎旨)를 내리신바 후손(後孫)은 지금(至今)도 광주(廣州), 성남(城南), 서울, 인천 등지(仁川等地)에서 세거(世居)하면서 선산(先山) 남한산성하(南漢山城下) 금봉동에서 매년(每年) 음(陰) 10월 15일 대제(大祭)를 받들고 있다. 종손(宗孫) 김종화(金鍾和)가 교지(敎旨) 20매(枚)를 보관(保管)하고 있다.
6. 강원도(江原道) 철원군(鐵原郡) 금화(金化)와 원남면(遠南面) 노동(盧洞)마을 일대(一帶)에서 세거(世居)하고 있다.
6ㆍ25사변(事變)과 1ㆍ4후퇴(後退) 당시(當時)에 월남(越南)한 김영순(金榮淳), 영선(永善), 운선(雲善), 봉화 등(奉化等) 종친(宗親)의 말에 의(衣)하면 선대(先代)에서 원래(元來) 평안도(平安道) 강계군(江界郡) 성천면 오포리에서 세거(世居)한 사실(事實)이 있고, 강원도(江原道) 금화군(金化郡) 원남면(遠南面)에서 약(約) 100호(戶)가 세거(世居)하면서 족보(族譜)도 보존(保存)하고 있으며 또한 조부(祖父)와
부친(父親)께서 경기도(京畿道)
고양(高陽)으로 시제(時祭)를 모시러 가시고 또한 고양군(高陽郡)의 종친(宗親) 어르신들이 원남면(遠南面)에 오시는 등(等) 시제(時祭)에 참례(參禮)하시면서 숭조정신(崇祖精神)의 앙양(昂揚)에 지극(至極)하시었다는 것을 그 당시(當時)를 기억(記憶)하신 김영선(金永善)과 봉화종친(奉化宗親)은 그 당시(其當時)에 20대(代) 청년(靑年)이었다고 한다. 지금(只今)은 67세(歲)이다.